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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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7-30 19:5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


건물은 사람의 시각을 모으고 사로잡기도 한다. 사람의 시각을 사로잡기 때문에, 때로 그것이 건물 자체에 대하여 신비감을 느끼게도 한다. 더 나아가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것 중에 대표적인 실례는 교회당이나 사원과 사찰이나 성당과 같은 종교적인 건물들이다. 이와 같은 것 중에서 교회당인 예배당을 문제 제기의 중심으로 올린다. 한국 교회만큼이나 교회당에서 기도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문제의 부분을 제기하니, ‘한국 교회에 성경적인 기독교가 잘 정착되어 있는가?’와 같은 총체적인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간다. 기도와 성전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하나만을 연계시켜 보았다. 사실, 교회당에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않고서 묵상을 하거나 외친다면, 그것이 사원을 바라보며 절하거나 사찰에서 염불을 외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렇게 성전을 주제로 잡아놓고 보니, 기도의 문제로 번져가게 되어 결국 성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건물이나 땅을 가리키는 전(殿)은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야곱이 꿈에서 본 곳이 하나님의 전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어 이러한 전을 가리키는 성전은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완전히 해석되고 막을 내린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참 성전은 여호와께서 언약하신 메시아이며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성전이다. 이 점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에서 확인하여 확증하지 못하면, 솔로몬의 건물성전에 매몰되어 빠져나올 수 없다. 솔로몬의 성전까지 보더라도, 그 전(前)의 성막이나 성소가 성경 기록의 목적대로 보여야 전체의 해석으로 연결될 수 있다. 또 솔로몬의 성전이 훼파되고 재건되어 예수 당시의 헤롯 성전이 나온다. 조금 뒤의 사도들이 활동한 성전은 건물과 연계되어 있다. 고린도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건물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의 건물이나 땅에 대한 해석이 신약시대의 오늘날까지 매우 큰 영향을 미쳐왔다.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전(殿)은 주로 솔로몬의 건물 성전과 아주 긴밀하게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다. 이런 점에 비해서 성전은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에서 각각 두 번만 솔로몬성전을 가리키고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가미한 성전은 결코 건물에 묶여 한정되어 있지 않는다. 이러한 점은 구약시대에 솔로몬의 성전이 훼파되었다가 재건되는 것에 관심을 끌고 간다. 그것은 바로 참 성전이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예표해 준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었던가?

이제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 성전을 성경에서 간략하나마 확인해야 할 것이다. 건물에 매몰되어 이 땅에 한정된다면 성도들의 소망이 어디에 있겠는가?
첫째, 이 성전의 근본은 성령이다. 예수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참 성전이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성령이 예수에게 임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확증되었다. 예수께서 건물성전 꼭대기에서도 성령으로 마귀를 이기셨다. 예수께서 건물성전에 들어가실 때도 성령으로 감동되었다. 성령을 배제하고서 성전의 근본을 볼 수 없다.
둘째, 이 성전의 과정은 몸이다. 성령이 충만한 예수의 육신이 성전이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을 증명해 주셨다(요한계시록). 예수께서 영원한 성전이심으로 그의 지체된 성도들도 성전으로 지어져 가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고린도서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도 성전의 근본이 성령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셋째, 이 성전의 결과는 주 하나님과 그 분의 아들이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성전을 볼 수 없다. 그것은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집중 잘 안 되면 분열된다
세상에 이런 나라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