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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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1-07 21: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21C 성경으로의 여행


밀레니엄(millennium)을 경험한 감동이 아직도 남아 있는가? 밀레니엄과 함께 온 세계는 21C 지금 빅데이터(Big Date)와 인공지능 시대다. 개인적인 삶이나 세계사는 그 원리 면에서 동일하다. 인생은 나그네이기 때문이다. 2017년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왔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2017년도 가을에 이르러 개인이나 인류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그중에서 1000년이 지나가는(pass) 여행에 동참한 사실이 있지 않았던가? 인간은 시간과 함께하고 시간에는 반드시 공간이 동반된다. 이런 사실에서 인간은 시간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중국의 요커(遊客=여행객)들이 한국을 많이 찾아왔다. 사드(THAAD) 문제로 이들이 줄어들어 큰 문제로 봉착했었다. 전국의 방방곡곡 특히 제주도에서는 이들이 찾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은 왜 여행을 좋아할까? 인간 자체가 나그네인 것과 분명히 관계있을 것이다. 여행은 관광(觀光)이다. 관광(sightseeing)의 뜻은 빛을 보는 것이 아닌가? 해 뜨는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우며, 일출의 광경을 본 사람은 그 하루와 함께한 셈이다. 하루는 기억하고 생각하지만, 묶어서 1000년을 생각하고 정리하기에는 너무도 먼 대상인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 대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안은 성경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天來)과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歸天)은 성경적인 여행의 본질이다. 하나님의 나랏일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신다고 성경이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눅13:22). 바로 지구(地球) 중에서도 예루살렘(耶路撒冷)으로 여행하셨다. 21세기에도 성경으로 여행한다는 것에는 분명한 목적지와 행선이 있다. 이제 크게 두 가지로 그 행로를 보고자 한다.
첫째, 구약성경으로 여행하는 행로이다. 구약성경의 큰 구도는 역사서와 시가서와 선지서이다. 여행의 목적은 교육과 통한다. 교육의 방법상에서 시각 교육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더 낫다(百聞不如一見)”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을 여행한다는 것은 성경을 공부(교육)한다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39권에서 어느 한 권을 좋아하는가? 보고 싶은 마음은 바로 가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인데, 구약성경을 39곳이라는 행선지로 생각하면 너무 많고 복잡하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로 위의 세 구조를 먼저 제시하게 되었다. 마치 가고 싶은 세 나라와 같다. 이 세 나라 안에 행선지 39곳이 다 들어 있다. 평생을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 구약성경의 몇 부분만을 보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으로 여행하지 않고서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한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은 여행하는 신앙생활이었다.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으로 여행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여행하였다. 또 민족적으로는 바벨론으로 여행하지 않았던가? 21세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시대에 성도들은 구약성경을 얼마나 맛있고 멋지게 또 뜻 있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인가?
둘째, 신약성경으로 여행하는 행로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피난했다. 성령으로 잉태되어 육신을 입으신 것이 본질적으로 여행이다. 구약성경은 분량 면에서 거의 신약성경의 3배이다. 신약성경의 분량이 적다고 해서 쉽고 빨리 둘러볼 수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사람의 몸에 비유해 본다. 사람의 몸은 목을 중심으로 상하로 연결되어 있다. 여행이라는 측면에서 목 위의 머리를 신약성경에, 목 아래의 몸을 구약성경에 비유하고 싶다. 사도 바울은 구약성경 전체를 잘 본 다음에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하였다. 21세기에도 바울의 전도여행은 빛나고 있다. 신약성경을 우선 두 곳으로 나누어 여행한다는 마음으로 상고해 보면 어떨까?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전체적인 확인의 중요성
신구약 성경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