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20-06-30 19:4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인간들의 주요한 시간관


2020년 6월은 6·25전쟁이 일어나고 70년이 지나간 시간이다. 이 70년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편에 기록된(90편)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는 진리의 말씀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들이다. 어떤 천하장사가 이 시간을 극복해 내며 이길 수 있을까!
이 말씀이 시간에 대한 찬사인가? 아니면 세월에 대한 한탄인가? 각 개인의 관점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간의 속성은 인간들에게 빠르다는 것으로 깊게 다가와 있다. 시간은 세월(歲月)로 인간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많은 격언과 속담으로 표현되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두 가지를 나열해 보자. “세월은 기다리지 않는다(歲月不待人; Lost time is never found)”와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歲月如流水; Time like a flowing water)”이다.
여기서는 이름만 적어도 다 아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시간관을 손꼽듯이 다섯 가지를 열거해 보려 한다. 등잔 밑이 어둡듯이 인간에게 달라붙은 시간을 잘 몰라 얼마나 헤매고 방황하게 되었는지를 고백하고 싶기 때문이다.

첫째,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시간을 통속적으로 해석한 최초의 학자이다. 그의 <자연학> 안에서는 시간을 운동이나 변화(이동)로 보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은 전후 관계에 있어서의 수(數)이다.
둘째, 어거스틴이다. 그는 시간이 얼마나 난해한지를 고백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거의 절망의 경지를 헤맸다고 한다. 그의 <고백록)에는 시간의 문제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 그는 시간이란 비존재로서 흘러가는 것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과거는 이미 없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이라는 것에 근거해서이다. 그는 인간 마음의 팽창인 기억과 기대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을 마음의 팽창(느낌)이라고 보았다.
셋째, 칸트이다. 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공간과 대응시켜서 시간을 규명하고자 했다. 그는 시간이 길이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다른 시간이 동시적으로 될 수 없고 계속이며 연속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칸트의 시간관은 시간에 대한 수량적인 사고로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대동소이하다. 그는 시간을 다만 공간과 이원론적으로 보았다.
넷째, 헤겔이다. 헤겔은 칸트의 시간과 공간의 이원론적 해석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동일시했다. 시간은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지금의 이행(移行)”이라 했다. 즉 시간을 지금이라고 할 때에 지금은 이미 지금이 아니며, 지금이 아닌 것이 또한 지금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다섯째, 바르트이다. 바르트는 영원과 영원 사이에 시간이 존재하는 이론을 만들었다. 칼 바르트는 시간관에 있어서 창조 전과 종말 후를 단절하고 영원과 시간을 단절시켰다. 바르트의 입장은 영원과 시간을 대립시키는 희랍철학의 시간관에서 볼 수 있는 이원론이다. 또 실존주의 철학에서 언급하는 실존의 시간성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에의 물음을 반복하였고, 다른 저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 있어서 근원적인 시간성을 본질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강하고 중요하게 강조하는 “영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근본적으로 조명할 수 없었다.
위와 같이 애물단지처럼 되어버린 시간에만 매인 자기 일생을 해결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몸부림을 쳤던가? 전도서는 솔로몬이 전도자와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을 집중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듬뿍 주셨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참 경고(警告)자
유착의 위험한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