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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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10-17 19:3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교회개혁론』 저자와의 특별대담_14


<한국크리스천신문>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미완의 16세기 종교개혁이 성경 진리에 확고한 토대를 두고 완성으로 매듭이 지어져가는 제2의 종교개혁운동을 소원하며 특별대담의 연재를 시작한다. 이번 특별대담은 2017년 10월 10일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과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대담자로 참여하였다.

1. 일반적으로 종교는 의식(儀式)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국가 기관은 물론 무속인(巫俗人)들도 그들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복잡한 의식을 강조합니다. 일반 대중들도 종교의 본질을 깊이 고민하며 이해하기보다는 종교적 의식을 더 선호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종교 생활을 지배하는 의식이 성경말씀을 토대로 하는 기독교 이해에 부정적인 많은 영향을 미친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간 자신의 중심을 결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성에 의한 결과로서 이로 인해 하나님을 볼 수 없으므로 각자가 나름대로 보이는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게 되지요. 이러한 우상숭배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절대로 어떤 우상의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경계하셨어요.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 제대로 알지 못하면 무엇인가 종교적 의식을 행하는 것이 마치 신을 믿는 행위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몰라서 그러기도 하고 알고도 속이기 위한 기만행위로 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령한 예배생활로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섬기는 신을 만들기 때문에 기독교 역시 의식을 중시하는 우상종교로 전락하게 됩니다.
구약에 보면 성전의 지성소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셨다고 했어요. 지성소에 있는 언약궤 안에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만나항아리를 두도록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의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하시려는 것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의식이나 형식의 도구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즉 여호와를 경외케 하려는 것이 외식적 행위에 따른 우상숭배로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마지막인 말라기 선지서에 보면, 여호와는 언약백성이 행했던 모든 제사의식을 폐기해 버린다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가정이나 교회 그리고 사회생활 등 모든 삶에서 성경교육에 바탕을 둔 올바른 신지식이 시급합니다.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외식이나 가식적인 형식에 따른 우상숭배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2. 저자는 『교회개혁론』에서 장로교 헌법의 예배 모범은 비성경적이며, 그 결과 ‘예배 모범’이 기독교 진리를 왜곡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라고 비판하신 바 있습니다. 즉 ‘목사=제사장, 교회당=성전, 연보=제물, 주일 오전=거룩한 공예배’는 비성경적임을 지적했습니다. 성경적인 기본 상식만 있어도 그 문제점을 쉽게 알 수 있는데, 한국 교회 성도들은 왜 이렇게 쉽게 속을 수밖에 없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토대를 둔 기독교 진리를 확증할 수 없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서양 기독교 역사를 보면 로마 가톨릭의 몰락 시기, 중세 말 14세기경에 이미 초기개혁자들 일부는 교회의 유일한 법은 ‘오직 성경만’이라고 외쳤습니다. 이미 6백여 년 전에 성경 전체를 잘 모르는 상태였던 당시에도 교회 머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이며, 교회의 표지는 절대 진리인 성경이라고 했어요. 그리고 교회는 죄인을 구원하는 곳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의 모임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들기 시작하자 앞에 외친 원리들을 성경진리에 입각해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다시 로마 가톨릭의 사제 중심의 형식주의와 외식의 잔재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개혁교회는 교회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면서 교회정치에 세속적인 법과 정치제도를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보시다시피 부패에 부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찾아오는 자들을 일깨우는 것은 오직 성경진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마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제도와 의식을 만들어서 지도자 권위 중심의 관습을 고착화하고 말았습니다. 대표적인 부패의 상징이 바로 ‘예배 모범’입니다. 성경적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데도 상황에 따라 만들어서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이단’으로 정죄하는 일이 빈번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종교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가장 비성경적인 경우가 많은 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현실정입니다. 정말 서글프고 안타깝습니다.
분명히 말하건대 현 개혁파 교회의 예배모범은 로마 가톨릭의 미사의식과 방불합니다. 예배나 미사는 제사행위를 표현하는 말로서. 교회 부패의 가속화를 야기하는 결정적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배 형식의 제도화는 반드시 교권의 강화, 교권의 절대적 신권화를 낳습니다. 딱하지만 일반 성도들은 그저 주일 오전 한 시간을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합니다. 그냥 조용하게 마음만 편하게 설교나 듣고 가면 되는 게 아니냐고 합니다. 로마 가톨릭이 아직도 건재한 이유는 성경진리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때그때마다 대중이 원하는 바를 형식화하거나 제도화하고, 의식화해서 가시화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성(聖)’을 붙인 성전, 성화, 성상, 성구, 성지 등등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로마 가톨릭입니다. 여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운동이 종교개혁인데 한국 개혁파 교회는 500년 전 폐기했어야 하는 쓰레기더미를 다시 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참으로 개탄스럽습니다. 인간의 내면 즉 영혼을 지배하는 것은 진리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인간은 권력과 제도와 형식과 관습에 의해 지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미숙한 자에게는 안정감도 주고 소속감도 느끼게 하여 마음에 위로를 받게 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자기가 큰 집단에 소속해 있을수록 종교적 안정감을 누린다고 착각합니다. 이렇게 되면 기독교는 천박한 종교로 전락하고 맙니다. 건물을 웅장하게 지으면 사람이 운집하고 그러면 그 사람들은 소속감을 느끼고 자신이 큰 집단에 소속했다는 것으로 자기 과신을 하고 마치 그것을 정상적 종교생활처럼 착각합니다.

3. 저자는 성도들이 우상숭배와 같은 의식에서 벗어나 수준 높고 건전한 신앙 생활을 하길 바라면서 로마서 12장 1절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를 매우 강조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참다운 ‘예배’가 무엇인지 쉽게 설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9장 10절에 보면 구약의 모든 제사 제도 즉 성막, 제사장 그리고 제물의 규례들과 관습들은 육체의 예법으로 “개혁할 때” 곧 약속된 메시야가 오시면 모두 사라질 것으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서 한 여인을 만났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때 그 여인이 ‘예배할 곳’을 예수께 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는 구약의 제사 행위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도 이 구약의 예배와 로마 가톨릭의 잔재인 외형적 미사의식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주의해 봅시다. 예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어떤 특정한 공간이 예배 장소일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십니다. ‘이 산에서도 예루살렘에서도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렀다고 하면서 그것은 바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통해 완성할 신령한 예배임을 알려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의 처소에 대해 묻자 예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왔다고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 성도들은 어떤 특정한 장소나 시간에 따라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그에 속한 모든 성도들은 어떤 장소 어떤 시간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와 ‘신령한 유기체’가 되어 항상 영적 예배 곧 산제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바로 영적 예배이며 산제사입니다. 그리고 거듭나고 중생한 우리의 속사람은 그리스도와 신령하게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성도들의 영혼을 주관하십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등불이며 인도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성도라도 다른 성도에 대해 명령하거나 지배하거나 나아가 함부로 간섭해서도 안 됩니다. 성도들이 미혹당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흔들리는 이유는 절대 진리인 성경말씀이라는 토대가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경진리와 함께모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세속적 이권에 따라 모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경만 교회의 절대표지임을 확증 받은 우리의 시대적 사명을 항상 명심하기를 바랍니다.

4. 개혁파 교회가 아직도 로마 가톨릭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성경적 의식이 있다면 성례(聖禮)라고 불리는 ‘세례’와 ‘성찬’입니다. 한국 교회가 세례에 대해 잘못 이해하여 비성경적으로 행하고 있는 점은 무엇이며, ‘참다운 세례’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중세의 교황제 수립 후 16세기 종교개혁까지 천년 이상 지속된 로마 가톨릭의 인본주의적  관습과 제도, 우상숭배를 부추기는 형식들은 서구 개혁파 교회가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렇게 쉽게 극복되기 어려웠습니다. 천년 이상 관습화된 로마 가톨릭의 폐습이 한 순간에 없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개혁파 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우상숭배와 교황권위 그리고 각종 허례허식을 일소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개혁파 교회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중세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가는 길을 남겨놓게 됩니다. 바로 가톨릭의 칠 성례 중 세례와 성찬예식을 마저 버리지 못했습니다. 개혁파 교회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 대해 처음에는 성경공부로 대처했으나 결국 미사와 같은 예배의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미사(missa)의 제사의식이 그만 개혁파 교회의 예배의식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교육을 더욱 강화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교회의 유일한 목표로 삼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개혁파 교회가 성경을 더 연구하고 번역하고 가르치고 인쇄하고 보급하는 일에 더욱 매진했어야 했는데 그만 미사와 같은 의식이 예배라는 이름으로 교회당에서 형식적 권위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세례의식을 곁들이게 되었습니다. 개혁파 교회가 성경진리에 대한 권위를 지키며 공부하는 일에 매진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성경연구기관 혹은 성경학교가 본질이 되어야 하는 교회당은 제사인 예배를 비롯한 세례의식을 집행하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이며 우상숭배로 채워지는 처소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따라서 교회 회당을 로마 가톨릭의 성당처럼 제사들 드리는 ‘성전’으로 변질시키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개혁파 교회는 세례를 물로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불로 줍니다. 셰레 요한이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뒤에 오시는 예수께서는 성령과 불로 준다고 했습니다. 불세례는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해 주실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단번에 드리신 영원한 제사에 그의 지체인 성도들 역시 옛 사람의 죄악을 십자가에 못 박아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택한 백성의 타락한 옛사람을 죽이시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함께 죽고 부활하심과 함께 다시 살아난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도 바울도 거의 물로 세례를 주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물로 주는 육체적인 방식이 아니라 신령한 의미로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에는 세례의식에 얽매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말씀으로 양육된다면 의식에서 벗어나 매사에 그리스도의 신령한 세례의 의미를 확신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의식을 더욱 강화하고 있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세례의 진의를 깨닫기에는 점점 어려우지고 있습니다.

5. 세례와 마찬가지로 한국 교회는 성찬(聖餐)에 대해서도 성경적 의미는 간과한 채 형식주의에 의한 의식으로 인해 폐해가 적지 않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과 올바른 성찬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며, 그의 살은 장차 그리스도가 보내실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에게 공급해 주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신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 되신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신과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먹고 마시는 것이 일상사이며 성도들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애찬의 의미는 매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신과 생명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심오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떡을 먹고 잔을 마실 때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잊지 않고 기념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에 진정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식사문화의 본질은 생명의 주되신 그리스도의 신과 생명의 의미를 전하는 ‘애찬(愛餐)’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개혁파 교회의 성찬의 본질은 천주교의 화체설이나 다름없이 모호하고도 어설프게 진행하는 기념설의 의미 그 이상입니다. 모호하고도 어설프다는 말은 부정적인 뜻입니다. 즉 미숙하고 나약한 성도들을 형식과 의식으로 기만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더 이상 속이지도 속지도 말길 바랍니다.


6. 대부분의 성도들이 성경에서 벗어난 채 많이 사용하는 말들 중 하나가 ‘예배’라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교회 밖인 가정에서도 종교적 의식을 치르듯이 가족의 온갖 경조사에 ‘예배를 본다’고 합니다. ‘아기 돌 예배, 개업 예배, 발인 예배, 추도 예배’ 등등 많은 행사에 ‘예배’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비성경적인 것들이 왜 이렇게 쉽게 확산되는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저급한 문화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로마 가톨릭은 신자들의 모든 생활을 교황이나 주교가 주관하는 일곱 가지 성례로 의식화하고 제도화 했습니다. 이러한 제도들이 개신교에서 개탄스럽게도 모두 복원되고 있습니다. 모든 행위와 행사를 ‘예배’라고 칭합니다. 사실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이 본질인데, 지금 사용하는 예배라는 말은 인간을 위해서 사용합니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너무나 벗어나고 있습니다. 장례식의 경우, 세속의 입관식을 입관예배, 발인식을 발인예배, 하관식은 하관예배로, 제사는 추도예배 등등으로 그야말로 교회가 세속을 따라가기 바쁩니다. 유교의 세속적 문화에 붙어있는 온갖 ‘식’을 교회는 모두 ‘예배’로 둔갑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각한 부패 현상이 계속 이어집니다. 모든 의식을 예배로 바꾸면 그야말로 모든 예배의식에 제사장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 제사장은 권위를 가지고 예배의식을 주관합니다. 그래서 모든 예배에는 목사가 절대 필요하도록 제도를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결국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오래하게 되면 성경진리로 스스로 성숙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목사의 권위에 종속됩니다.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숙하고 나약한 성도들도 분위기가 연출하는 이벤트에 대단히 취약합니다. 신앙의 주체성이 없다면 유혹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진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우상숭배를 신앙으로 착각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7. 저자는 한국 교회의 허례허식이 교회 생활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목사 위임식, 장로 장립식, 권사 취임식, 집사 안수식, 교회 기공식과 준공식, 헌당식과 입당식 등의 허례허식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폐습들이 왜 번성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한국 교회가 극복할 수 있는지, 있다면 그 방도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개혁파 교회 안에서 제도적으로 많은 의식들이 예배라는 명칭으로 진행도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를 위한 행사 명칭부터 집사에게 해당하는 행사 명칭이 각각 다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진리를 통해 절대자유를 누려야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계급화하려는 의도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목사에게는 위임예배라고 합니다. 장로에게는 장립예배라고 하고 권사에게는 취임예배라고 합니다. 집사는 안수 받은 대로 복종을 강요받아 목사와 장로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안수예배 뿐만 아니라, 기공예배, 준공예배, 헌당(봉헌)예배, 입당예배 등등, 한마디로 ‘돈 잔치’를 위한 명목일 뿐입니다. 어떤 교인도 그 재물과 돈이 하나님께 간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도 쉽게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합니다. 세상 권력이 백성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재물과 영혼을 장악하기 위해 계급문화를 조장하고 있고 고착화하고 있습니다. 어떤 곳보다 한국 교회에 관료주의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허례허식들은 모두 성직이라는 미명하에 세속보다 더 교묘하게 성도에 대한 계급화를 꾀하는 속임수입니다. 교회 헌당식과 입당식을 함다며 하나님께 드린다고 황금으로 열쇠를 만들어 당회장 목사에게 증정합니다. 그리고 등기를 하는데 목사 개인 명의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이 봐도 웃을 일인데 이러한 속임수가 통하는 곳이 한국 교회입니다. 제 아무리 지식이 많고 세상 이치에 밝다고 해도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진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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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말씀의 운동력으로 성경권위 회복 운동 I -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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