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17-11-28 21:3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여섯. 말씀의 운동력으로 성경권위 회복 운동 II - 체코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계 22:17)

1.  16세기 종교개혁의 준비: 15세기의 자국어 성경 번역과 출판

1384년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Jon Wyclif) 사망 후 ‘성경권위’ 회복 운동을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로마 가톨릭 대적자들이 경멸하기 위해 불렀던 ‘롤라드파(the Lollards, ‘헛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이란 뜻)’가 있었다. 이들은 자국어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소유했다가 붙잡히면 고문과 화형을 당했다. 그래서 이들은 일정 분량만큼 외워서 그들이 함께 모이면 성경 한 권이 만들어지는 몸과 영혼과 입술이 하나가 되는 성경말씀 수호자와 전파자들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국어 성경 사본과 누더기가 된 위클리프의 신학 소책자들을 영국 전역으로 전파했다. 롤라드파는 인쇄소를 통하지 않고 사본을 직접 전하는 방식으로 목숨을 건 문서 선교를 전개했다. 이들의 집회 방식은 일반적으로 행하는 예배 의식인 찬송가와 설교를 함께 사용하지 않고 오직 성경을 읽는 것과 설교하는 것이 전부였다. 1517년 독일에서 점화되는 종교개혁 이전에 이미 영국에서는 100년 훨씬 이전에 이렇게 성경권위 회복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많은 성도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하게 하시면서 준비하고 계셨다. 

이 무렵 다른 유럽 전역에는 인쇄술이 보급되었다. 이는 성경 번역과 출판을 더욱 가속화했다. 책의 대량 판매를 통해 이익을 계산하는 출판업자들이 출판시장에 더욱 가세하면서 16세기 종교개혁 이전 유럽 전역에는 성경이 빠르게 자국어로 번역·확산되었다. 성경권위 회복은 어느 특정한 사람이 그리고 어떤 특정 집단이나 국가에 한정되지 않았다. 동시다발로 하나님께서 중세 로마 가톨릭의 허구를 개혁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는 사실이다. 1466년과 1522년 사이 독일 전역에는 성경이 20판이나 나왔다. 1471년에는 이탈리아어로, 1477년에는 화란어로, 1478년에는 스페인어와 체코어로 출판되었다. 스페인 내에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는 곳에도 1492년에 성경이 자국어로 번역되었다. 1473~4년에 프랑스에는 성경 요약본까지 판매하고 있었다. 이로 보건데 하나님께서는 1517년 마틴 루터가 95개 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이기 전에 철저하게 성경권위 회복을 준비시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얀 후스의 성경권위 사수와 체코의 종교개혁

체코의 프라하는 1382년 당시 신성로마 황제 찰스 4세가 자신의 수도로 만든 곳이다. 자신의 딸 보헤미아의 앤을 잉글랜드 왕 리차드 2세와 결혼시키면서 자신의 권력 확장의 입지(立志)를 굳히기 위해 프라하에 거대한 성당들과 대학도 설립하였다. 찰스 왕은 프라하를 “세상의 종말을 위한 새 예루살렘”(347) 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영국의 위클리프 개혁사상에 영향을 받기 전부터 교회 개혁을 부르짖던 곳이었다. 귀족들은 로마 가톨릭이 자신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싫어했으며 교회 및 국가 내 독일인에 대해서도 저항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립운동과 교회 개혁의 중심에 프라하 대학의 철학부 학장이자 사제였던 얀 후스(Jan Hus, 1372~1415)가 있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 1414년 성찬식에서 후스와 그 추종자들은 사제(司祭)들만 받을 수 있었던 떡과 포도주를 당시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던 유럽에서는 최초로 일반 신도들에게도 분배했다. 그리고 일반 성도들뿐 아니라 유아를 위한 성찬도 자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운동에 영국의 위클리프 영어 사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위클리프파와 후스파의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1415년 콘스탄츠공의회는 본래 약속했던 후스의 신변 보호 약속을 배반하고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를 설득하여 후스를 사로잡는다. 후스는 끔찍한 환경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결국 화형을 당한다.

후스의 죽음 이후 프라하 시민들은 분노하면서 ‘보헤미야 교회’를 설립한다. 처음에는 귀족도 지지했으나 황제와 교황의 압력으로 결국 교세 확장은 저지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분노에 찬 시민들은 혁명의 상징이었던 성찬식에 사용하는 성광(聖光, 성체 강복 때에 성체를 보여주는 데 쓰는 제구祭具)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였다. 얀 젤리브스키가 이끄는 폭도들은 13명의 가톨릭 충성파를 위층 창밖으로 집어던져 죽이기도 한다. 이른바 ‘프라하 인간투척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격한 행동들은 1560년까지 수도원과 교회의 미술품을 대규모로 파괴하는 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이후 개혁운동은 교황의 군대에 의해 실패한다.

이 와중에서 살아남은 후스파 교회는 처음부터 성경진리에 기초한 철저한 종교개혁 운동을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 이들은 로마 가톨릭 전통을 단지 자신들도 자유롭게 행하는 정도에서 개혁의 자유로움을 추구했다. 성상(聖像), 거리 행진 그리고 마리아 숭배와 같은 전통을 유지했다. 그러면서 떡과 포도주를 모두 베푸는 성찬인 ‘양형영성체(Utraquist, 이종성찬파)’ 의식을 중요한 의식으로 여겼다. 미흡했던 개혁 운동은 다른 후스파 교회를 통해 좀 더 진행하게 된다. 

후스파 보헤미야 교회는 당시에 로마 교황청에서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 주교가 부재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주요 마을과 도시 귀족 그리고 지도자들은 로마 가톨릭 권력에 맞서서 각각 자기 마을을 어쨌든 스스로 지키는 데 힘을 들였다. 이러한 방식은 종교개혁이 본격화되면서 이른바 ‘정부주도형(magisterial) 종교개혁’이라는 방식의 결정적 배경이 되기도 한다. 후에 마틴 루터가 독일에서 신변 보호를 받고 독일어 성경 번역을 할 당시 그를 보호하고 적극 후원했던 작센(Saxony) 주의 선후(選侯) 요한 프리드리히와 같은 경우가 정부주도형 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른바 교회권력의 상위층에서 개혁이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시민과 제후(諸侯)가 함께 하는 아래로부터 교회의 개혁 운동이 중앙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체코에는 급진적 후스파인 ‘보헤미아 형제단’이 있었다. 이들은 양형영성체파와 1475년에 분리했다. 주로 피터 첼시키(1390경~1460경)와 신양성경에 나타난 초대 기독교의 생활 방식을 따르고자 하였다. 피터 첼시키는 존 위클리프와 순교자 얀 후스의 사상을 계승하면서 과격한 무력 사용을 반대했다. 유토피아적이며 무정부적 경향을 보이는 이들은 정치적 억압, 사형, 전쟁복무 혹은 세상권력에 대한 복종 및 일체의 폭력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성찬식의 임재설(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교리)를 부정했으며 사제직 사상도 거부했다. 이들의 개혁 운동 역시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547년 보헤미아에서 로마 가톨릭 군대에 의해 한차례 격변을 겪은 후 많은 사람들이 모라비아 지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들을 ‘모라비안 형제단’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로부터 3세기 후에 잉글랜드의 ‘존 웨슬리(John Wesley)’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체코는 후스의 후예들인 ‘양형영성체파’와 ‘보헤미야 형제단’을 통해 “유럽에서 교황에 대한 중세적 충성을 철회했던 최초 지역”(351)이 되었다. 이후 로마의 교황권은 점점 보편적 교회의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교황수위권’은 허구라는 사실이 유럽 전역에 폭로되었다.     


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152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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