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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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4-12 19:1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대 배도, 어떻게 오는가!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배도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배도는 달콤한 속삭임으로 인류에게 다가왔다. 에덴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감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아름다운 동산에 정말로 아름다운 연인들이 있었다. 어느 날 여인은 아름다운 열매를 달고 있는 한 나무 아래를 거닐고 있었다. 그녀는 왜 하필이면 그 동산 어느 곳이나 평화롭고, 안전하게 산책하기 좋았을 텐데 그 나무 곁으로 갔을까? 그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자기도 중앙무대에서 우주적 조명을 한 몸에 받고 싶어서였을까? 어쩌면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우주의 중앙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사탄이 그리로 유인했을 것이다. 뱀은 여인에게 접근했다. 아마도 여인은 화려하고 찬란한 광채가 나는 그 뱀에게 금방 마음이 끌렸던 것 같다. 뱀은 그녀에게 속삭였다. ‘이 나무의 과일을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된대.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처럼 될까봐 따먹지 못하게 한 거야!’ 뱀의 달콤한 속삭임을 들은 여인이 그 나무의 실과를 보니 정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인류 첫 번째로 일어난 대 배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인류의 두 번째 대 배도는 다정한 입맞춤으로 다가왔다. 유다는 사전에 군인들과 군호를 짰다. ‘내가 입 맞추는 자를 체포하라’. 늦은 밤 감람산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짖게 깔린 어두움 때문에 사람을 식별할 수가 없을까 봐 그렇게 군호를 짰을 것이다. 유다는 스승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의 스승에게로 다가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인사를 했다. 그렇게 참 진리요, 참 도(道)이신 그의 스승을 배반하여 팔아넘겼다. 그것도 은전 삼십 량에! 은 삼십은 그 당시 한 명의 노예 값이고, 오늘의 가치로는 약 삼십여 만 원의 가치다.

인류의 세 번째 마지막 배도는 어떤 모습으로 올까? 그것이 궁금하다. 아마도 온 인류가, 그리고 온 교회마저도 빠져들어 갈만한 매력을 가지고 소리 없이 다가올 것이다. 서서히, 아주 치밀하게! 간교함이 사탄의 성향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아닌가? 바울은 현실적 어려움과 고난으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썼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 미혹하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을 혼란케 했던 모양이다. 배신(背信)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믿음과 의리를 저버림”이라 설명한다. 그러니까 “배도”(背道)란 기독교적으로 보면 ‘성경 진리를 저버린다’ 지금까지 믿고 따랐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저버린다’ ’하나님을 저버린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죽고 못 살았는데 더 좋은 것이 나타나니까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헌신짝처럼 버린다. 그것이 배신이다. 바울은 종말에 대해 말하면서 대대적인 배도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직전에 일어날 것이라고 예고한다. 여기 ‘불법의 사람’ 또는 ‘멸망의 아들’을 주석가들은 주의 재림 직전에 나타날 인격적 존재-적그리스도일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 대대적인 배도 현상이 일어나고, 그 후에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때 ‘주께서 강림하시면서 그의 입의 검으로 그를 죽이실 것이라’고 전한다.

우리 시대의 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참 진리요, 참 도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믿는다는, 참 진리요 참 도인 성경을 믿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법이다. 그것도 생명의 법이다. 그러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은 배도다. 성경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진 교회법을 어기는 것 역시 배도다. 그렇다고 본다면 한국 교회는 이미 대대적인 배도가 진행 된 지 오래다. 곳곳에 배도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없다고 말할 정도다.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개 교회뿐만 아니라 노회도, 총회도, 교계도 법을 알기를 우습게 안다. 법을 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까다로운 사람들이다. 은혜가 없는 사람들이다. 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은 항상 열세다. 그러니까 표결로 가면 지기 일쑤다. 다수가 이긴다. 그 다수를 얻기 위해 돈을 뿌린다. 한국 교회는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해낼 만큼 돈이 많단다. 현대 교회, 그리고 미래 교회의 배도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떡”으로 올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왜 시험하는 자는 첫 번째 무기로 “떡”을 택했을까? 떡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시험했을까? 식욕은 생존 본능이다. 자아유지 본능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물질만능주의, 맘모니즘, 풍요의 신학, 번영신학 이 모든 것들이 다 시험하는 자가 내미는 떡이다. 자본주의는 물질주의다. 우리나라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라 한다. 자본주의는 물질주의요, 물질주의는 무신론이다. 배도의 두 번째 얼굴은 천사의 얼굴로 가장한 명예다. 또 다른 얼굴은 부귀와 영화다. 현세주의요, 성공주의로 온다. 모든 사람의 본능적 욕망을 내면세계에서 부추기면서 매우 권위적이고, 그러면서도 신사적인 얼굴로 올 것이다. 성적인 문란과 타락은 어느 쪽에 속할까? 이 사회 어느 곳을 둘러봐도 성한 곳이 없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다(사 1:5,6). 오호통재라 주 여호와여 이 땅을 불쌍히 여기시고 굽어살피사 고쳐주소서!

통일교 원리강론은 선악과를 ‘성-Sex'로 해석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실수한 부분을 가린다. 선악과가 실제로 나무의 열매라면 입으로 먹었을 것이고, 그것이 허물이라고 깨달았으면 입을 가려야지 왜 하체를 가렸느냐 그것은 하체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남자가 죽을 줄 빤히 알면서도 따먹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성(Sex)이다. 오늘날도 죽을 줄 빤히 알면서도 따먹고 “미투(Me too)"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이 하루에도 몇 건씩 터진다. 이런 면에서는 통일교 선악과 해석이 그럴듯하다. 최후의 유혹은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빠져들 만한 매력적인 얼굴로 다가올 것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죄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교회 헌법’의 불법성을 폭로하다
아홉. 성경권위 확정의 절실함을 향해, 미완으로 끝날 유럽의 종교개혁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