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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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8-15 19:0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칼 바르트의 인간론


20세기에 신학을 하려면 바르트를 넘어서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는 그만큼 가히 ‘20세기 최고의 신학자’로 꼽히는 대가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던진 신학자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신정통주의’ 최고의 신학자인 바르트가 지금 혹독한 비평을 받고 있다. 그는 신학자이면서 윤리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런 그가 여비서랑 아내와 함께 35년간 한 집에서 불편(?)한 동거를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바르트를 추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바르트를 세계 최고의 신학자로 추앙하면서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던 후학들의 놀이터에 또 한 번 폭탄을 던진 셈이다. 문제는 그 불편한 동거에서 아내 넬리와 가족들도 편치만은 않았던 모양인데, 가족들에게 그런 불편을 끼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여비서와 아내와 함께 한 집에서 35년간이나 동거했던 바르트의 윤리관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칼 바르트와 샬로테 폰 키르쉬바움의 정신적 합일의 기쁨은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3권 안에 내포된 ‘인간론’과 더불어 절정을 이뤘다고 한다. 바르트의 <교의학>, 특히 인간론은 비서이자 반려 동지 격인 폰 키르쉬바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저작이었음은 자타가 공인한 바다. 바르트는 심지어 <교의학>책의 흰색 표지를 샬로테의 치마폭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르트가 그의 여비서 샬로테와 육체적 사랑도 했을까를 궁금해한다. 그러나 바르트의 윤리 문제를 성경적 윤리관으로 비추어 볼 때 그것을 꼭 증명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샬로테의 존재가 바르트에게 안정감을 주었고, 그의 총명한 두뇌가 바르트의 연구에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들은 이성으로서 서로 지고의 사랑을 나누면서 연구와 더불어 모든 것을 함께 향유했다. 그들은 인간으로서 그 이상의 행복은 없다고 생각했을 만큼 둘만의 사랑에 만족했다. 그들은 육체를 초월한 사랑을 공유했다. 그러니까 육체적인 문제는 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렇게 사랑을 나누고 있는 동안 그들은 여전히 육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결코 편하지 않았을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음도 기억해야 한다.
키르쉬바움은 표면상 처음부터 끝까지 처녀였다. 그러기에 애당초 성생활을 비롯한 모든 부부생활에 아무 경험이 없는 편이었다. 반대로 바르트는 여인의 육체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바르트는 엄연히 아내와 여러 자녀를 포함한 가족을 둔 기혼자였고, 따라서 성생활을 익히 안다는 점에서 '범부'로서 가족생활을 영위해 나아감과 동시에, 처녀인 한 여성을 늘 곁에 두고 최소한 정신적으로 또는 그 이상으로 상대방을 탐험할 수밖에 없는 특수한 처지였다. 바르트가 베른에서 공부하고 있던 스물한 살 때인 1907년 여름, '뢰지 밍어'라는 젊은 여성과 깊은 사랑에 빠졌었다. 바르트가 보기에 밍어는 미인인 데다 다정했고, 온전한 아내와 어머니가 될 만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고 판단돼, 그녀에게 자기처럼 신학을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바르트와 밍어는 둘 다 서로 결혼하리라는 절대 확신 같은 것을 갖고 있었으나 바르트의 부모가 이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바르트는 이를 묵묵히 수용했다. 마지막 만남 때, 그 둘은 그동안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모두 불살랐다.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1913년 바르트는 자신의 교인인 여섯 살 손아래의 바이올리니스트, 넬리 호프만과 결혼했으나, 거의 처음부터 트러블로 점철된 불행한 결혼이었다. 넬리는 주방 일꾼들을 너무나 거칠게 다루고 독단적이어서 수시로 일꾼들이 바뀌었다. 주방 직원들은 그녀를 참을 수 없는 존재로 봤다. 넬리는 남편 바르트도 그런 식으로 대했다. 반면 샬로테는 바르트의 외로움을 종식시킨 여성이었다. 그는 외로움을 지옥과 동일시했다. 바르트의 생애에 비춰볼 때, 이것은 역설적이다. 그는 여럿과 오랜 우정 관계를 지속한 놀라운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폰 키르쉬바움은 다정다감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다. 바르트의 삶은 그녀가 온 뒤로 극적으로 변화됐다. 이 편지들에서는 비용을 불문하고 그토록 함께하려 했던 이유가 밝혀진다. 그들은 거듭거듭 서로를 향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글로써 정답게 애무하는 느낌도 든다. 서로 함께 있으려는 탄식이 거듭된다. 서로를 걱정한다.
<칼 바르트-샬로테 폰 키르쉬바움 서신 모음>은 바르트의 편지 162편, 키르쉬바움의 편지 70편이 수록된 것으로, 이 편지들 속에는 너무나 많은 기쁨과 슬픔, 아픔이 서려 있다. 바르트는 이젠 더는 외롭지 않다며 자신의 심연의 욕구에 응해준 그녀가 얼마나 고마운지 표현할 길 없다고 고백했다. 특히 키르쉬바움의 편지에서는 둘이 함께함의 느낌을 말하면서 그 함께함의 중요성과 정당성, 그리고 전적으로 그에게 속한 느낌을 노래 후렴처럼 읊었다.
1933년, 바르트와 폰 키르쉬바움은 서로 결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아내 넬리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기에, 대신 한 집안에서 그들의 불편한 공생이 지속되었다. 넬리의 현 남편인 ‘유부남’ 바르트가 새로 사귄 여인인 폰 키르쉬바움과 ‘결혼’을 원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또 그만한 근거가 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자, 샬로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은 바르트는 셋이 함께 동거하며 살아가는 극단을 택했다. 그로 인한 아내 넬리와 자녀들의 고통과 갈등 역시 극단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놀랍게도 이것을 극복해 나아갔다. 오히려 바르트의 친구들이나 외부인들이 더 힘들고 안타까워했지만 말이다. 이런 현실이 바르트 자신이 그렇게 강조하고 외쳤던 기독교 윤리학과는 과연 어떻게 조화될까? 바르트가 청년 시절 결혼을 맹약했던 밍어 양 말고도, 그보다 어릴 적 사춘기 초기에 바르트의 풋사랑이랄까 그의 ‘여인’은 더 있었다. 그는 또 히르첼과 함께 댄스클럽에도 수시로 다녔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좋은 춤꾼은 되지 못했다.
아무튼 그즈음 청소년 바르트가 쓴 연애 시 겸 극 대사는 이랬다. “아름다운 소녀여, 난 지금 내 사랑을 선포해야겠어! 널 처음 본 때부터 난 너의 것… 내 가슴은 미친 듯 뛰놀지만, 난 평화로워 사랑을 통해 새롭고 더 큰 힘이 나의 것 되지! 내 근심의 무게가 이젠 더 내 영혼을 짓누르지 않고 나의 두려움도 가시네! 젊음의 기쁨이 영광스럽게 빛나고 내게 세상은 온통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네! 너, 내 사랑, 너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만 내가 그 어디 눈길을 돌리든지 내게 보이네! 네 두 팔 속의 영원한 행복은 내가 찾는 전부, 널 향해 내 길을 가네!”
바르트는 한 남자가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경험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까지 죄 된, 거듭나지 못한, 음란과 정욕이 가득한 육체 안에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죄를 사모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었던 육체를 가진 사람이었다. 바르트의 이론은 언제나 논리가 정연했다. 그런데 그의 논리가 하나님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게 한다는 어떤 이의 말을 곱씹어 본다. 필자는 그의 신학을 논할만한 잽은 못 된다. 하지만…! (교회와 신앙-발췌)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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