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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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2-04 19: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좌담회
객원기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6장은 ‘선행(善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선행’은 성경 특히 신약성경의 서신서에 많이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많이 사용하는 개념이기도 하며 종교를 벗어난 영역에서도 인간의 행동과 관련해서 반드시 사용하는 말입니다. 물론 고백서는 교회의 성도들,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난 15장에서 다루었던 ‘회개’한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기준에 따른 선한 행위’ 즉, ‘성경적 선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 호에서 회개의 비성경적 문제점을 비판했으며 대안도 짧게나마 제시했습니다. 선행에서도 근본적인 같은 문제점들이 있는지 살펴보는 유익한 좌담회가 되길 바랍니다.

박홍기 연구원  좌담회를 위해 먼저 제16장 선행에 대하여 1항부터 7항까지를 잠시 요약해 보겠습니다. 우선 고백서는 선행의 조건을 엄격하게 명시합니다. 사람에 의한 것도 아니며 성경적 근거를 둬야 하며 맹목성도 배제하며 선한 의도를 가장(假裝)한 것도 경계합니다. 그리고 2항에서는 선행은 신앙의 열매와 증거라고 하며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행을 위하여 지음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생은 거룩함에 이르는 선행의 열매를 ‘맺으므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3항에 가면 선행은 신자들의 능력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에서 나오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도 성령의 감화로부터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능력에 의한 감화력(感化力)을 말하면서 ‘태만’을 우리가 경계해야 하고 근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시작하면서 결론은 신자들이 스스로 나태하지 않도록 책임지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을 통한 보혜사 성령의 사역의 전능성을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4항을 보면 선행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할 수도 없거니와 의무상 당연한 것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5항에는 우리의 선행은 단지 ‘의무’로 했을 뿐이며 ‘무익한 종’이지만 성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했다면 자연스러운 결론은 선행은 전적으로 보혜사 성령의 은총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6항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행은 나중에 ‘상 받기’ 위한 조건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7항에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포함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동시에 선행을 하는 데 게으르면 하나님이 노하신다고 하여 다시 자율적 의지에 의한 인간의 행위를 강조합니다.
1~2항에서 선행은 은혜로 가능하며, 3항에는 인간의 의지로 해야 하며, 4~5항은 하나님의 은혜로, 6항은 다시 인간의 의지로, 7항은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인간의 의지를 혼합하고 있습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결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선행에 대한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에 대한 성경적 일관성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시작해서 행위로, 성령으로 시작해서 율법으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시작한 개혁파 신학의 정신이 한 세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지키지 못하고 훼손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깨닫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고, 성도에게 선행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성령의 사역이며, 하나님께 의로운 행위가 되게 하는 것도 성령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선행은 하나님께서 은혜의 선물로 주신 믿음의 행위이며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선행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나태하고 방종할까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불신하는 잘못을 범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의 ‘선행’은 그 출발도 과정도 평가도 전적인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다 !



객원기자  우리는 은혜로 시작해서 인간의 의지를 앞세우는 것을 제17장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7장은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모두 3항으로 되어 있는데 1항과 2항은 영원한 구원의 최종적 보장은 하나님 아버지의 값없는 은혜와 예정의 불변성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3항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은 사단에 속한 죄성에 의해 게으르거나 무서운 죄에 빠진다고 합니다. 일관성에 또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논의도 더 해 주시길 바랍니다. 

S연구생  고백서는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 대해 시작은 영원한 예정이며 이는 불변성을 갖추고 있다고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영원하신 중보 사역으로 구원을 확증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임하신 성령께서는 성도에게 내주(內住)하셔서 은혜언약을 견고하게 지키시면서 구원의 확실성과 무오성을 궁극적으로 보장하신다고 합니다. 아주 정확한 성경적인 고백입니다. 그런데 3항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나’라는 접속사 이후에 성도들은 사단과 세상의 시험에 빠진다고 지적하면서, 은총과 은혜도 어느 정도 빼앗기고 하나님의 진노와 성령의 근심을 일으키며, 일시적으로 심판을 초래한다고 하면서 끝맺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결론을 지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이는 사단과 세상에 맞서서 게으르지 말고 싸워야 한다는 말인지, 아니면 은총이 소멸되는 일이 일어나도 궁극적 구원은 괜찮다는 말인지, 분명한 결론을 얻을 수 없습니다. 무책임한 고백문을 만들고 말았다고 봅니다. 제 생각은 간단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혜사 성령의 보호로 시작했으면 결론도 그렇게 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섭리 과정에서 일시적으로는 인간의 눈에 구원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더라도, 창세전 영원한 예정은 행위와는 무관하게 얻은 것이므로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는 보혜사 성령께서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인간이 범죄 했으므로 인간이 스스로 회개해야 한다’는 발상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범죄 하는 것은 성령께서 보호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아버지의 은총으로 다시 회복되는 것도 전적으로 보혜사 성령의 사역과 은총의 결과입니다.
1항과 2항에서 성도의 궁극적 구원을 강조하다보니 세상에서 일어나는 교회와 성도의 타락과 부패 그리고 부정과 불법은 ‘괜찮냐’는 질문 앞에서 3항이 삽입된 것 같습니다. 궁극적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는 ‘우리가 그래도 조심할 것은 해야 한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조금 전 원로의 지적처럼 하나님의 전능성을 불신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리고 보혜사 성령께서 감동으로 기록하게 하신 성경진리인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충족한 말씀의 능력을 부정하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성도의 궁극적 구원이
영원한 예정의 불변성에 기초를 두고 있다면,
성도의 과정적 삶도
영원한 예정의 무한한 은총을
계시하는 과정이다 !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지금 개혁파 신학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고백문은 성경적 확신의 답답함과 미숙함을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사실 성도의 구원에 대한 궁극적 확신을 보혜사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라면, 그것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원천은 바로 성경 진리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궁극적 구원을 얻습니다’는 말을 수백 번 반복한다고 하나님의 궁극적 구원이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진리를 너무도 분명히 기록해 주셨습니다. 보혜사 성령은 그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순서대로 자기 백성들에게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그 존재의 영광선포의 관점-<<성경신학총서>>에서 이 관점을 ‘언약성취섭리사’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에서 깨닫게 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 대한 고백은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지 인간 스스로의 확신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개혁파 교회는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말하면서도 성경 진리에는 별 관심도 없고 개혁파 교회의 절대적이며 유일한 표지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을 너무도 소홀히 다룹니다. 성경 진리에 대한 소홀함은 참담한 결과를 낳고 있습니다. 문서설이 횡행하고 있고 이단이 속출하여 교회를 혼란시키고 성도들을 사단의 자녀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러한 상황을 절망적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지나친 걱정도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불신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지 간절히 기도할 마음을 주신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 한국 교회의 이러한 참담하고 처참한 상황이 보혜사 성령께서 성경권위를 통한 영원한 구원의 궁극적 확신을 깨닫게 하시는 좋은 기회가 되길 소원하고 있습니다. 곧 ‘성경신학학술원’(www.ibt.or.kr)의 수천 시간 강의는 성도의 궁극적 구원의 문제를 확실하게 해명하고 있으며, 나아가 창세전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비밀을 보혜사 성령께서 확증해 주신 것임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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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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