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19-11-19 19: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비성경적인 복음 초청 (개혁시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을 위한 멋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는 전도하는 과정에서 한 번쯤 이런 말을 듣거나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전도 단체 소속의 전도인들이나 대학생 선교 단체들의 멤버들이 매우 흔하게 잘 사용하는 방식이다. 만약에 그 전도 대상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아예 그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라고 권유한다. “당신이 만일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예수님은 당장 당신의 마음속에 오셔서 당신의 일생에 주인이 되어 주시고,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이때 흔히 다음의 성경구절이 인용되기도 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상대방이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이면 영접기도를 하게 한다. 상대방이 머뭇거리면 자기를 따라 하게 한다. “예수님! 주님을 영접합니다. 지금 제 마음에 오셔서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기까지 따라 하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집 가까운 교회로 다니십시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한다.

이런 경우는 대중 집회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설교자가 열심히 전도 설교를 하고 찬양이 조용히 흐른다. 찬양 인도자의 적절한 멘트와 함께 찬양을 하면 회중의 분위기는 고조되게 마련이다. 이때 설교자는 초청 멘트를 날린다. “이 시간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형제자매들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함께 영접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상당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온다. 그리고 인도자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인도자는 숙달된 말솜씨로 기도를 한다. 그러면 거기 나온 사람들은 이 전도자가 구원한 사람들의 수에 가입된다. 그래서 자기가 몇 명을 구원했느니 하는 그 전도자의 열매가 된다. 정말 그럴까? 어떤 이웃 교회 집사가 찾아와 상담을 한 적이 있다. 그 집사는 잘 모르지만 그 담임 목사는 나와 동기생이다. 얘기인즉 얼마 전에 자기 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그때 부흥사가 헌금을 작정하게 해서 백만 원을 작정했단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기가 속은 것 같더라는 것이다. 마치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는 것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털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헌금이란 자고로 멀쩡한 정신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지 진정한 헌금이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 집사님은 가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다. 무엇이 감사했을까! 신앙적인 깨달음이 있어 감사했을까? 돈 백만 원을 다시 찾은 것 같아서 감사했을까?

현대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법정에 기소장을 낸 폴 워셔는 이런 식의 전도에 대해 일갈한다. 전도는 하나님의 속성을 전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충분히 알려 주는 것에서 전도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면 생명을 희생할 수도 있다고 처음부터 말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마 16:24) 우리는 전도 대상자에게 이렇게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원하십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소중합니까?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를 원하십니까? 당신의 죄를 아십니까?”
현대교회는 죄를 아주 피상적으로 다룬다. 죄를 피상적으로 아는 사람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죄를 아는 사람에게는 회개를 말해 주어야 한다. 죄와 죄의 결과를 아는 사람이어야 회개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설교자는 복음을 전할 권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 전할 권세와 의무가 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위한 성경적인 원칙들을 가르칠 권세와 또한 의무가 있다. 그러나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권세는 없다. 그것은 성령님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다한 설교자들이 “당신은 예수를 마음에 영접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고 참람한 말을 하곤 한다. 이 말이 신성모독적인 것은 어떤 사람도 그 사람의 구원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예수를 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서는 반드시 그 예수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설교가 끝난 후 설교자의 초청에 따라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와서 카드를 작성하곤 한다. 설교자는 이 카드를 들고 “이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이 사람을 위해 큰 박수로 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저항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허다하다. 그러나 어떻게 사람이 감히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이것은 하나님의 큰 구원을 두고 사람이 장난을 치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새로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어야 한다.
“이 사람은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안에 그리스도가 참으로 형성되었는지, 그가 회개와 믿음을 참으로 성경적으로 이해했는지, 그가 성령님의 역사로 큰 확신과 기쁨을 얻었는지, 이것이 분명해지기까지 함께 수고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영접기도로, 그렇게 해서 자기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자기의 전도 실적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다. 폴 워셔는 현대교회가 이런 일을 아무런 가책 없이 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우리 시대의 교회들, 우리 교계의 사역자들은 어떤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憲法) 비판 5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憲法) 비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