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16-03-30 21: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생각하지 못하는 자들의 악행

영화 <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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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영화다. 조정래 감독은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한 위안부 할머니의 그림에서 영화의 모티프를 얻었다. 그러나 투자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결국 7만 5천여 명의 시민 후원금으로 14년에 걸쳐서 겨우 완성하였다. 출연하는 배우들은 출연료를 받지 않은 채 재능기부로 열연했고 감독과 스텝들은 집과 차를 팔아 자금 마련에 힘썼다. 그럼에도 개봉 당시 39개 상영관으로, 상업 영화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관객의 지지와 호응으로 곧 메가박스와 cgv, 롯데 시네마에서도 티켓 오픈하여 삼일절엔 872개 상영관을 확보하는 등의 기염을 토했다. 와!
이 영화의 의미는 여기에 있다. 영화를 만든 사람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과, 반드시 봐야 한다고 목소리를 낸 사람들의 뜻과 마음이 하나였던 것. 작품의 완성도 보다 의미 자체에 가치를 두기에, 나 또한 <귀향>을 추천하는 바이다.   
사족을 달자면 개인적으론 '꼭 봐야 하는 영화'라는 멘트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한 교조적인 시각은 또 다른 반감과 불편함을 가져와 자칫 영화의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는 -앞서 말했듯- 할머니들을 위로함이 목적이다. 이는 어떠한 교훈이나 선동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원래는 신랑과 예매만 해놓고 (기부 차원에서) 관람은 하지 않으려 했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례는 익히 알고 있었고, 재현된 고통을 다시 목격하는 일이 너무나 가슴 아팠다. (그런데 보게 되었다.)
영화에 전면으로 드러난 일본군의 잔악함은 언제 봐도 치가 떨렸다. 그 잔악함은 언제나 ‘필요 이상’이라는 농도를 지닌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한다. 본래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고통의 정도는 미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는 내내 일본군에 대한 혐오와 증오가 화염처럼 들끓었다.
본디 인간은 죄 속에서 태어났기에, 그 악함이 밖으로 표출된 정도이지 않겠냐 마는 그것을 표출함과 표출하기를 참는 것으로부터 인간과 짐승의 경계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것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너무나 참담해서 종국에는 내가 느끼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치 전범이었던 루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본다. 아이히만은 가스실이 설치된 열차를 고안해내, 보다 효율적으로 유대인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이를 추궁하는 재판장에게, 자신은 여태껏 법을 어겨본 적 없는 사람이며 단 한 사람도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았고 오직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답한다. 이에 정신과 의사들은 그가 준법정신이 투철하며 심지어 자신들보다 더 정상이라고 판정했다. 한나 아렌트는 그 지능적이고 높은 단계의 지성에서 비롯되었을 거로 생각했던 악이, 실은 생각하지 못하는 능력 즉 ‘사유 없음’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올바르게 사는 것, 정의나 진실과 선을 추구하는 일에는 반드시 사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악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본능적이고 즉각적이며 멍청하고 일차원적인 이득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욕심 하나로 시차 없이 꾐에 빠지지 않나. 자기가 다윗보다 뛰어나야 한다는 이유로 살인도 불사하는 사울은?) 선행을 하려면 고도화된 지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악행은 그럴 필요가 없다. 선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철학과 신념이 있지만 범죄자들에게 그따위 게 있을 리 없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일본군들의 그 단순한 악마성에 차라리 위로를 받았다. 일본군뿐만 아니라 현재 일어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악행과 그 주범에 관해서도 말이다.
하나님은 악을 섭리하실 때 인간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하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달성할 욕망을 주시고, 이를 합리화할 논리를 주신다. 그래서인지 악인들의 논리는 희한하고 신기해서 기가 턱턱 막힐 때가 많다. 그들이 나중에 패망하거나 패망하지 않거나를 떠나 더 중요한 것은, 나를 그러한 악의 도구로 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세 휩쓸리고, 욕망만 살짝 건드려도 눈이 뒤집히는 연약한 나를 당신의 일에 참되게 쓰시기 위해 붙들어 주시는 것. 그러한 마음을 주심이 깨달아지는 것.
내가 지금 다른 사람을 헐뜯고 해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거나, 정당하지 못한 일에 매진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걸 나만 모른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아찔한지. 쓸데없는 일에 기운 쏟지 않게 해주심에 감사하다. 하나님 앞에 말씀을 바로 세우고, 냉철하게 스스로를 성찰하여 악행 따위 저지르지 않는 하나님의 딸이 되어야 쓰겠다. 아울러 일본군 같은 만행을 저지른 인간들은, 그들이 설령 성도라 하더라도 지옥 불에 잠시간 담갔다가 건져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도 가져본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진아 (장안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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