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문화

 
작성일 : 20-06-30 20:0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과 교회음악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은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가 주도한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신학적 문제의 개혁과 동시에 교회음악의 개혁까지도 포함한다.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사이며 신학 교수였던 독일의 마르틴 루터에 의해 시작되었다. 교회의 재정적인 타개책으로 면죄부를 판매한 것에 대하여 루터가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회 정문에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빠른 속도로 독일 전역에 파급될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가 1440년대에 발명한 인쇄기의 영향이 컸다. 종교개혁가인 루터, 츠빙글리, 칼빈 세 사람은 종교개혁의 업적도 크지만 기독교 음악에 끼친 영향 또한 크다. 그들의 기독교음악에 대한 생각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배에 음악을 도입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견해의 차이가 있었다. 이 세 사람이 교회음악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루터는 대학 시절 문학사를 전공하면서 음악을 공부하였고 류트(Lute, 만돌린 비슷한 악기) 연주자로도 인기가 있었다. 그 후 수도사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가 사제가 되었고, 1512년 신학박사가 되어 성서신학 교수로 임명받았다. 교황청은 면죄부 사건 이후 그를 면직하였고, 그의 저서들을 소각시키려 하였으나 독일의 여론은 루터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음악에서도 40여 편의 개신교 찬송가를 작사·작곡할 정도로 왕성한 음악 활동을 하였다.

루터의 음악관은
- 음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
- 모든 음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기악음악도 허용한다.
- 음악을 듣고 기쁨을 느끼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 음악은 신학과 매우 가깝다.
- 음악은 사람의 생각, 감각, 마음, 감정을 다스린다.
- 하나님이 음악을 통해 복음을 선포하신다.
- 음악은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을 불러일으킨다.

루터는 성경이 금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루터가 교회음악에 영향을 미친 것은 회중 찬송이다. 그는 찬송 역시 초대교회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의 성직자들과 훈련받은 음악가들의 전유물이었던 교회음악 활동이 회중 중심의 찬양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배에서의 음악의 기능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며, 크리스천의 경건성을 훈련시키고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로 보았다. 따라서 회중 참여도를 높이기 위해 의식 음악을 제외하고는 자국어로 찬송을 부르도록 하였다. 그는 ‘악마에게 아름다운 노래를 독점시켜 줄 수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세속적인 노래에도 가사만 바꾸어 코랄을 만들었다. 코랄(Chorale)이란 누구나 쉽게 부르고 익힐 수 있는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중적인 찬송가를 말한다. 반주 없이 회중이 단성부(unison)로 노래했으며 16세기 이후 4성부로 발전되었으나, 지금까지도 집회 시 회중은 소프라노의 멜로디를 부른다. 어거스틴(354)이 찬양을 받으실 분인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었다면, 루터는 찬양하는 자, 즉 회중에 초점을 맞추었다.

스위스의 종교개혁가인 츠빙글리(1484~ 1531)는 루터의 회중 찬송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그는 루터가 민요나 대중가요에 가사만 바꾸어 찬송하는 것, 가톨릭의 그레고리오 성가 일부를 가사만 바꾸어 그대로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가톨릭의 전통 아래 이루어진 것은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으며, 루터식 회중 찬송과 오르간 사용을 금하였으므로 그의 찬송은 무반주 제창으로 노래하였다. 그는 루터보다 음악적으로 훨씬 전문적인 지식이 있었으며 여러 가지 악기를 연주할 뿐 아니라 작곡과 편곡도 하였다. 자신이 작사가, 작곡가로 활동하였으면서도 츠빙글리는 왜 종교개혁가가 된 이후 예배 시 음악 사용을 금하였을까? 그는 노래와 음악이 말씀을 가린다고 생각하였다. 말씀이 중심에 서 있고, 말씀이 성령을 통해 작용한다고 확신하였다. 음악이란 아름답지만,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음악에 의지하거나 음악이 중요시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음악 때문에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말씀을 들을 귀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음악을 하는 시험에 빠질 수 있다고 우려하였다.

프랑스 출신의 종교개혁가인 칼빈(1509~ 1564)은 위의 두 사람보다 한 세대 늦게 활동하였다. 칼빈은 츠빙글리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의 것은 모두 버리려고 하였으므로 초기에는 예배 시간에 음악을 엄격히 금지했다. 예술이나 가공적인 것이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가능성조차 배제했다. 화려한 교회의 장식을 제거하고 성인상, 성화, 십자가, 화려한 제복, 촛불을 켜 놓은 제단도 없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강대상만이 놓여 있었다.
그가 생각하는 음악관은, 거룩하다는 가톨릭의 ‘성가’들은 사람의 영혼을 오도하여 위험에 빠지게 하는 음악이며, 춤과 함께 부르는 대중들의 음악은 퇴폐적이어서 인간을 타락의 길에 빠지게 하기 쉬우므로 이들을 모두 배제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예배 시 음악을 엄격히 제한하였고, 악기 사용을 허락하지 않았고, 화음을 넣어 합창으로 노래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칼빈은 완전히 타락한 우리 인간은 하나님 찬양의 노래를 지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지어진 시편을 부르는 것만을 고집했다. 그러나 그는 스위스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로 도피해 있는 동안 루터파 교인들이 회중 찬송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아, 3년 뒤 제네바로 돌아간 후 1539년 최초의 프랑스 운율 『시편가』를 만들어 예배에 찬송을 도입하게 되었다. 칼빈이 생각하는 찬송가는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노래,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나게 하는 노래,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영광 돌리게 하는 노래’였다. 칼빈의 찬송에 대한 생각은, ‘신앙을 고백하는 찬송,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는 찬송,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찬송’의 세 마디로 요약된다. 그가 완성한 『제네바 시편가』(1562년)는 단순한 가락의 단성부로, 찬송의 내용이 강하고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가톨릭에서는 교회음악이 잘 훈련받은 사제와 찬양대 등의 전유물이었고 라틴어로 불러서 교인들은 그 의미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에는 모든 교인들이 자국어로 찬송을 부를 수 있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골 3:16)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19)

참고문헌  문현호,『개정판 교회음악사』, (코람데오, 2015)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한용환 장로 (기독교지도자협의회)

찬송가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선지자 하박국의 찬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