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0-09-02 20:3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고난을 통해서 전사가 된 칼빈


사실 칼빈은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서 공부는 많이 했지만, 사실 그는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만큼 환자였다. 병원도 약도 제대로 없던 시절에 위장병, 기관지천식, 신경통, 두통 등등 온갖 합병증에 시달리던 사람이었다. 생애 후반에는 하루에 한 끼의 식사도 겨우 할 정도의 병약한 사람이었고 침상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디 그뿐인가. 칼빈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짐을 평생 지고 간 고통과 고난의 삶이었다. 그가 맡은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설교였다. 주일에 두 번 평일에 네 번 정도로 강해 설교를 했는데, 그렇게 많은 설교를 모두 강해 설교로 하되 원어에 충실하면서도 목회적 관심과 가톨릭과 이단을 물리치는 메시지를 만드는 것은 정말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필자도 40년 동안 목사로서 또는 신학 대학의 교수로서 살아왔지만 이 작업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칼빈은 끊임없이 그에게 도전해 오는 가톨릭주의자들의 공격과 당시에 망나니 같은 자유주의자(리버틴)들과 논쟁하기 위하여 논문을 쓰고 공개 장소에서 논적들에게 논리는 논리로, 사상은 사상으로 맞서 싸워서 이겨야 했다. 피를 말리는 이론전에서 그는 늘 승리하였다. 그러나 그 후유증은 심 각했다. 논쟁에 패한 자들은 칼빈을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뱉었고, 때로는 테러의 위협을 받으며 숨어 지내야 했다. 그러므로 칼빈의 고통과 스트레스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신앙의 절개를 지킨 칼빈

사실 칼빈에게 도전하는 세력들은 이단과 가톨릭과 자유주의자만 아니었다. 제네바 의회 지도자들 또한 말은 개혁주의 신앙을 가졌다고 하나 칼빈에게 끊임없이 도전하고 칼빈을 배척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칼빈이 제네바의 설교자로 개혁자로 일하기 시작한 후에 2년 동안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웠다. 솔직히 말하면 칼빈은 불란서에서 온 외국인이었다. 제네바시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방어를 위해서 사사건건 문제 제기를 하고 반대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실 칼빈은 제네바시에서 낯선 한 불란서인이었고,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런데 칼빈은 철저한 교육 프로그램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성도들을 교육하는 일에 매진하고 제네바시의회를 통해서 교회와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제네바에서 2년의 삶을 헌신했지만 결국은 시의회의 결의로 칼빈은 추방당한다. 목회자로서 개혁의 지도자로서 추방결정을 받은 칼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시의회는 칼빈을 지지하는 세력보다 반칼빈파들이 득세했기 때문에 투표로서 그를 추방시켰다. 그 사건은 인간적인 모멸감, 자책감, 허탈감이 칼빈을 얼마나 괴롭게 했을까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과 조직의 명수인 칼빈도 반대파의 득세에는 어쩔 수 없었다. 칼빈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신앙의 절개와 진리의 확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것이 반대자들로부터는 엄청난 공격의 자료가 되었고 칼빈은 융통성이 없고 자비가 없는 자로 낙인찍혔다.


피난의 아품이 성숙의 기간이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Strassburg)로 피난을 갔다. 칼빈은 원래 조용하게 학문활동 곧 저술활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오랫동안 입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도 칼빈은 자기의 뜻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새로운 일감이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즉 불란서에서 피난 온 사람들을 위한 목사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3년 동안 더 성숙한 목회자로 설교자로 변화되어 갔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를 보완하고 여러 책을 집필했다. 따지고 보면 칼빈에게는 제네바의 추방이란 아픔을 안고 갔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큰 일감을 맡기시고 더 큰 미래를 준비하는 기간이 된 것이다.
한편, 칼빈이 없는 제네바는 무질서의 천국이 됐다. 본래 제네바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미지와는 퍽 달랐다. 이 도시는 본래 상업 도시로서 외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인구 이만 명이 채 못 되는 도시에 온갖 불법, 탈법, 사치, 음란, 퇴폐의 도시였다. 칼빈이 의회를 장악하고 교회를 힘있게 목회할 때는 엄격한 훈련 프로그램과 권징을 통해 질서를 잡아갔으나 칼빈이 없는 제네바는 암흑천지가 되었다. 그래서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축출한지 3년 만에 다시 그를 영접하기로 했다. 그들은 칼빈의 신학과 신앙 그리고 그의 리더쉽이 필요했다. 역사적으로 한번 추방된 후 다시 청빙받기는 칼빈이 처음이라고 본다.
칼빈의 가슴앓이는 또 어떠했을까? 그러나 칼빈이 또다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종교 개혁자로서 칼빈의 활동_ 07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로 본 칼빈의 삶_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