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0-11-27 20:4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다시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_ 10


칼빈이 제네바를 떠난 후에 제네바는 구심 점을 잃고 방황했다. 칼빈이 처음 제네바에 있을 때 시 의회는 낯선 이방인 그리고 철저한 개혁자 칼빈을 맞이하기에는 참으로 버거웠다. 칼빈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로 교회를 세우려 하고, 윤리적 도덕적으로 아름다운 제네바 도시를 건설하려는 그의 열정에 제네바 당국자들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칼빈을 추방했다. 하지만 칼빈 없는 제네바는 더 이상 개혁이 불가능했다. 칼빈이 제네바를 떠난 후 3년 동안은 이른바 반칼빈파와 자유파들이 득세하였다. 그러나 잔인무도 한 범죄가 들끓었으며 퇴폐적이고 음란한 윤리적 타락이 제네바를 뒤덮었다. 그러나 칼빈을 추방했던 지도자들은 사회적 부도덕과 교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뿐더러, 그들 자신들이 완전히 신용을 잃고 말았다. 더구나 가톨릭의 공세나 이단들의 집요한 공격에 신학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무장된 논객이 없었다. 이에 더해 추기경 사돌레토(Jacopo Sadoleto)가 힘없는 백성들을 가톨릭의 울타리에 가두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때 칼빈은 「사돌레토에게 보내는 답신」이란 논문에서 아주 명쾌하게 가톨릭의 잘못을 조목조목 지적함으로 가톨릭 당국이 다시 반박할 수 없도록 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시 도전하리라

일이 그렇게 되자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 같은 유능한 개혁자를 추방한 것은 백번 잘못했다는 여론이 들끓었고, 칼빈이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야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1540년 9월 21 일 모두가 칼빈의 정책과 신학과 신앙에 순종하기로 약속하고, 그에게 다시 돌아와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을 받은 칼빈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했을 것이다. 내칠 때는 언제이고 급하니 다시 요청하는 그들의 심사를 칼빈은 꿰뚫고 있었다. 그렇게 칼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사과 한마디 없던 제네바 시의회의 재청빙을 받았을 때에 칼빈은 더욱 마음이 상했다. 그래서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가지 않 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 그러나 맨 처음 제네바에 머물렀을 때와 비슷하게 마틴 부처와 파렐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제네바로 가게 되었다. 당시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돌아가서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수락했다. 물론 칼빈은 스트라스부르크에 머무는 3년 동안 목회와 설교와 상담을 하면서 인간적으로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더욱 성숙해 있었다.

칼빈의 카리스마에 대답을 잃은 가톨릭

칼빈이 제네바로 입성했을 때, 시의회는 칼빈을 열렬히 환영했었다. 그리고 칼빈은 시의회에 나타나서 ‘‘영원토록 제네바의 충복(忠僕)이 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제네바의 환영은 첫날뿐이고, 칼빈 앞에는 이전보다 더 큰 난제들이 쌓였고 그 후 10년 동안은 로마 가톨릭주의자들과 자유파(리버틴)와 이단들을 상대로 끊임없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때가 바로 칼빈이 제네바에서 벌인 혈투의 시기라고 표현했다. 칼빈은 깡마르고 연약한 환자였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와 확신 그리고 반대자들을 물리칠 수 있는 확실한 교리 체계와 논리 그리고 감히 칼빈의 말에 대꾸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나온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칼빈 자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칼빈이 믿었던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에 대한 확신 때문일 것이다.

종교회의를 만들어 권징, 훈련, 질서를 세움
 
칼빈이 제네바에 다시 도착하자마자, 일차적으로 교회는 제네바 시의회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서 자유를 갖는다는 보장을 받아낸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서 교회가 제네바 시민의 생활을 감독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갖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천에 옮기려 할 때 기득권 세력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시에 종교회의를 조직했으니 이를 콘시스토리(Consistory)라고 한다. 콘시스토리는 오늘날의 당회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교회의 권징과 훈련, 질서유지를 위한 것이었는데, 당시 제네바에서 칼빈이 제정한 콘시스토리는 시민들의 종교 문제는 물론이고 일반 생활사의 문제들까지 재판하고 치리했다. 만약 어느 시민이 신앙원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는 종교회의에 소환되어 충고와 견책 그리고 개선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심지어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종교회의에 회부되기도 했다.
칼빈이 1553년까지 제네바 시의회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던 중요 핵심은 종교회의의 권한을 어느 정도로 유지하며, 시민의 생활에 대한 교회의 통제 한계가 어디까지이냐 하는 문제였다. 또 시민들은 종교회의가 자기들의 생활 전체를 감독하는 것으로 보고 점차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특별히 남녀 간에 불륜문제로 저촉되는 사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다. 종교회의에 가서 문책당하는 사람 중에는 가정 싸움, 목사를 비판하는 일, 극장에 가는 것, 음담 패설을 하는 것, 댄스하는 것 등도 있었다. 그런데 종교회의 역할을 오늘의 독자가 생각하기는 칼빈을 독재자로 몰아붙일 사람들도 있겠지만, 칼빈의 진심은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고 성도는 성도다워야 하므로, 교회는 하나님 의 말씀 선포가 정확히 이루어지고, 성례가 바로 집행되고, 권징이 바로 시행되는 곳에서만 참된 교회가 이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교회 문제는 곧 국가의 문제이고, 국가의 문제는 곧 교회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칼빈과 제네바 아카데미_ 11
스트라스부르크의 칼빈_ 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