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2-01-12 10:5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사랑과 화해의 목사, 칼빈_29


칼빈 목사는 사랑과 화해의 목회자이다. 칼빈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문헌으로서 전혀 가치가 없는 배신자 볼쉐 신부의 악의에 찬 비방을 근거로 칼빈에게 비뚤어진 이미지를 심었다. 그러나 칼빈의 진면모를 알려면 칼빈의 편지를 봐야 한다. 거기에는 칼빈의 내면의 소리, 참 목자의 마음, 이웃과 교회와 세상과 소통하는 정겨운 내용이 있다. 우리는 칼빈의 편지 속에 인간 칼빈, 목사 칼빈, 개혁자 칼빈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다.
칼빈은 가슴이 따뜻한 목회자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되 한없이 동정심이 많고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목사였다. 칼빈의 설교와 편지를 읽으면 금방 알 수 있다. 칼빈을 비방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역사적인 문헌인 그의 방대한 설교집과 편지를 읽지도 않고 의도적으로 칼빈을 반대하고 증오하도록 선동하는 사람의 말을 따른다. 심지어 장로교회 목사들까지도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자도 있음을 보았다. 몇 가지 실례를 들면 목사로서 칼빈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칼빈이 사랑과 화해의 사람인 것은 다음과 같다. 칼빈은 제네바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칼빈은 교회의 평화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이른바 교회의 기득권 세력 가운데는 칼빈의 철저한 개혁적 설교가 마음에 들지도 않았고, 은밀히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칼빈은 제네바 시민이 볼 때는 외국인이었다. 그러나 칼빈이 제네바교회에서 축출되어 스트라스부르크로 간 후에 제네바교회는 칼빈의 설교를 사모하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자연스럽게 그 성도들이 뭉쳐서 그룹이 만들어졌고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룹의 이름을 기에르맹(Guillemlins)이라고 했다. 은혜를 사모하고 칼빈의 말씀을 그리워하는 그들이 후임자의 말을 순순히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하는 칼빈 목사가 교권에 의해서 물러나게 된 것을 가슴 아파했다. 그런데 그들은 신임목사에게 성찬을 받아야 할것인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신임 목사에 대한 불신임을 하고 있었고 교회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싸울 지경이었다. 그때 칼빈은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우리로서는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를 구성하는 교리가 제위치를 갖고 보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1538.10.24 편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교회를 그토록 불행하게 흐트러뜨리고 또 거의 뒤집어 놓았던 그 사건 이래, 우리의 뒤를 이은 사역자들과 그대들 사이의 분쟁과 분규에 대해서 듣는 것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그대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행동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이 그대들에게 해야 할 것보다는 그대들이 다른 이들에게 해야 할 것에 우선 몰두해야 합니다.”(1539.6.25 편지)

칼빈은 이런 편지들 가운데 ‘화해’란 표현을 여러 번 썼다. 솔직히 말하면 칼빈도 인간인지라 자기를 축출한 교회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남았겠지만 칼빈은 하나님의 교회의 화평과 성도들과 ‘화해’, 신임목사와의 ‘화해’를 먼저 생각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고 교회가 교회답게 성장하는 것이 우선이므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오히려 나무라고 성찬을 받으며 신임목사를 도우라고 했다. 이런 칼빈의 목사로서의 마음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른바 원로목사와 담임목사의 관계에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전임자는 후임자의 목회가 성공적이 될 수 있도록 멀리서 도우며 교회의 유익을 첫 번째로 생각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다.


교회 수습에는 겸양과 양보가 최우선

칼빈이 사랑과 화해의 사람인 것은 또 다른 예에서 볼 수 있다. 1556년 베스트팔(Joachim Wesphal)과 논쟁이 한창일 때 칼빈은 프랑스 교회를 분열시키는 한 싸움을 조정하기 위해서 독일의 프랑크푸르트로 갔다. 거기서 칼빈은 교회의 연합과 화평을 도모하는 일 외에는 다른 어떤 의도가 없음을 선언했다. 또 자신은 그들의 입장과 반대되는 토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칼빈은 이단과 자유주의자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냉철한 토론의 달인이었으나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수습하는 일에는 겸양과 양보와 화해의 사람이었다. 그때 칼빈은 열린 대화와 우아한 태도를 통해서 양쪽을 화해하게 만들었다. 학자들 중에는 칼빈의 이러한 교회 내의 화해를 조정하는 일을 가지고 칼빈은 에큐메니칼주의자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종교는 꼭 같다는 식의 종교다원주의자의 발상이 아니고, 교리는 필요 없고 삶이 중요하다는 식의 에큐메니칼이 칼빈이 추구한 방법이 아니다. 칼빈은 같은 하나님, 같은 그리스도, 같은 성경을 믿는다면 다투고 싸우면 안 되고 서로 화해와 사랑으로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칼빈을 가리켜서 제네바의 개혁자라고 한다. 그러나 차라리 제네바의 목회자, 제네바의 설교자로 불러도 된다. 모든 인간에게는 명암이 있다. 칼빈이라고 해서 완벽한 인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자료를 바탕으로 잘못된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된 경우가 칼빈이다. 칼빈은 가장 욕을 많이 먹은 인물이지만 그것은 일생동안 적들과의 전투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사랑과 화해의 목사였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정성구 목사 (총신대학교 명예교수 / 전 총신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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