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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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13 19:2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정신의 반역 I : ‘교황권위’가 ‘목사권위’로 둔갑


16세기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정신은 교황 권위의 거짓과 허구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키고 ‘성경 권위’를 회복한 운동으로 규정할 수 있다. 보혜사 성령께서 주후 95년경 사도 요한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최종 완성하셨다. 모세로부터 사도 요한까지 무려 1600여 년 동안 40여 명의 기자를 통해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이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오류 없이 충족하게 기록된 절대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확정된 놀라운 사건이었다. 기록 기간으로만 보더라도 인간적 상식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시간이다. 많은 나라와 제국의 흥망성쇠와 격변하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이념과 사상, 문명과 문화의 변천 속에서 불변의 진리 체계로 보존되어 이렇게 손안에서 읽고 또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기적처럼 다가온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사랑의 능력이라고 밖에는 더 이상 표현할 말이 없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진리의 모든 요건을 정확하게 구비한 하나님의 유일한 특별계시 기록이 바로 성경이다. 수많은 명제의 하나님 계시 중심적 배치와 배열, 무수한 사건의 논리적 정합성, 근거와 주장 사이의 논증적 확실성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단절 없이 이어진다. 구조 면에서 통일성을 지니고 있으며 의미 측면에서 단일한 주제로 모인다. 

성경의 명제 하나하나에 담긴 뜻은 내용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미 중심’으로 접근하도록 되어 있다. 가령, 창세기 1장 1절 내용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이다. 의미 중심의 시각으로 접근한다는 말은 ‘왜 처음에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하는 물음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경의 마지막 내용인 요한계시록 22장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가 왜 이러한 내용으로 성경의 마지막에 등장하며 그 의미는 무엇인지 묻는 방식이다. 모든 성경 본문을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 ‘의미 중심’의 접근 방법이다. (이와 관련된 방향으로 성경을 연구하여 ‘언약성취섭리사’적 관점에서 성경 권위를 확증한 연구 결과가 있다. 박용기 저, 『의미분석 성경개론』, 성남: 진리의말씀사, 2005.)

성경에 기록된 절대진리 앞에서 제대로 숨쉬기도 벅찰 정도로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마땅하지만, 절대진리 성경교육의 전당(殿堂)이 되어야 마땅한 한국 교회는 진리를 배역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종인지 적그리스도의 종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곳곳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야단인데, 정작 성경 권위의 확증과 보존과 전수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문서설의 공격으로 난도질당한 성경, 목사 자신도 신뢰하지 않는 휴지조각이 된 성경 몇 구절을 읽어놓고 성도들을 온갖 잡설로 농락하고 있다. 종교개혁 본산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교회 방문을 ‘종교개혁 성지순례’라며 팔고 있는 관광상품들이 난무하고 있다. 사실 종교개혁이 이른바 ‘성지(聖地)’라고 불리는 것들에 대한 폐습을 없애는 운동이었건만 종교개혁 발상지와 유적지를 ‘성지순례’ 한다는 것을 보면, 모르고 저러는 것인지 알고도 속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종교개혁자들이 목숨을 던지며 음흉하고 교활하며 사악한 중세 로마가톨릭의 ‘교황 권위’와 싸우면서 ‘성경 권위’를 지키고자 했건만, 한국 교회에는 지금 목사의 권위가 중세의 부패한 교황의 권위보다 더욱 뻔뻔스럽게 높아지고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은 성도들이 미몽에서 깨어날까 두려워 성경 번역자들을 엄단했으며 성경해석의 권한은 오직 교황만 갖도록 했다. 그런데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종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 바로 한국 교회에서 벌어진다. 교파와 교단을 막론하고 성경 권위를 확증하여 성도들에게 바른 진리를 전하는 것을 교회의 유일한 사명으로 삼는 교회들이 점점 드물다. 아예 이러한 사실에 관심조차 없다. 교황청에서 만든 인위적 악법으로 개혁자들을 재판정에 세워 처단하거나 화형 시켰던 것처럼, 한국 교회는 노회나 총회에서 만든 인위적인 법과 제도를 가지고 성도들을 통제하고 단죄하고 심판한다.

교회 생활에서 현실적으로 목사의 허락 없이는 어떤 교회 운영도 힘들다. 아니면 목사의 세력화를 견제하기 위해 당회원이라는 이름으로 장로들이 또 다른 권력기구를 만들고 있다. 이쯤 되면 성경 권위를 확증하여 성경 진리를 전승한다는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온데간데없어진다. 현행 종교법상 재정(財政) 관리권과 강단 사용권, 인사발령권과 재판 집행권은 모두 목사의 손아귀에 있다. 교회의 유일한 표지인 ‘성경 권위’가 교회 존립 목적이 아니라 권력과 부와 명예를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표지가 된 지 오래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부터 150여 년 전 대동강 쑥섬에 던져진 웨일즈 선교사 토마스의 피 묻은 성경, 이 성경을 전하고자 이국땅에서 같은 형제처럼 피 흘린 선교사들과 신앙의 선배들이 함께 지키고자 했던 성경 진리의 토대 위에 건립된 주님의 몸 된 신령한 교회다. 한국 교회는 얼마나 더 부패할지, 어디가 그 마지막일지 종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닫고 있다. 분명 하나님 여호와는 살아계신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의 섭리 속에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 천의 선지자’처럼 교황 권위를 흉내 내는 목사들과 달리 성경 권위를 수호하고자 했던 개혁자들의 길을 걸어가는 종들이 아직도 한국 교회에 있기를, 무익하나마 그러한 종으로 남도록 간절히 애원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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