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18-07-25 20:3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종교개혁 정신의 원형찾기 V : ‘축도(축복기도)’의 허구에서 벗어나기 1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한국 교회 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비성경적 미숙함과 불법이 판을 치고 성도들은 수십 년을 속고 또 속고 있다. 성경의 무지로 인한 혹세무민, 불법적 교권에 의한 침탈, 거짓 제도의 협박에 의한 영혼의 병듦 등이 그것이다. 그중에 하나가 목사가 복(福)을 빌면 복이 진짜 내린다고 ‘착각’하는 경우다. 물론 그 복의 내용도 성경에서 약속한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돈 많이 벌고 자신과 자식이 잘 먹고 잘 쓰는 그야말로 극히 세속적이며 앞에 인용한 ‘창세전 신령한 복’과는 상관없는 복이다. 교회에 나가는 목적부터 세속적인 복(福)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수십 년을 교회당에 왔다 갔다 한들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확증하는 것과는 별 소용이 없는 일이다. 성경을 통해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 자녀 된 무한한 은총의 복을 받았다는 진리를 아는 것과는 무관한 생활이 전개된다. 이처럼 교회 생활에서 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신앙생활 평생을 좌우하는 결정적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복과 관련해서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구원받은 증거와 잘못 연관시키고 천국에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순복음 교단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그 교단뿐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친다)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게도 된다(요삼 1:2)는 구절을 잘못 해석하여 신앙 좋으면 매사 잘 풀리고 몸도 건강하게 된다고 많은 목회자들이 그것이 아닌 줄 자신도 알면서 그렇게 의도적인 거짓을 전달한다. 분명 의도적인 잘못된 해석이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강도와 도둑들, 악덕 기업주들, 인신매매범들과 악한들이 잘 사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일본을 비롯한 전범(戰犯) 국가들이 저렇게 잘 사는 것을 무엇으로 설명한단 말인가? 다시 말해 교회 나와서 목사의 축복을 받으면 잘 된다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결국 축복하는 자나 복을 비는 자나 모두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의 노예가 되는 주술적 행위다. 축복하면 복 받는다는 것이 성경적 근거가 없는 허구라는 것을 목사 스스로 너무 잘 잘 안다. 정말로 복이 펑펑 쏟아진다면 자신이나 가족들 친척들에게 하지 (성도들에게 하듯 가족들에게는 왜 축복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에게 하려고 하겠는가? 성도들도 성경진리의 전당인 교회당을 우상숭배의 강도 소굴로 만드는 공범(共犯)에서 돌아서야 할 것이다.   
요한삼서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진리를 전파하고 수호하는 자가 세상으로부터 더 힘든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준다. 당장 요한삼서를 기록하는 사도 요한 자신이 밧모섬에 유배를 가 있지 않은가? 영혼이 잘 되면 범사가 잘 되지 않고 몸도 더 피곤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 본문이 증거하고 있다. 얼마 전 성도에게 들은 가슴 아프고 답답한 내용이다. 새벽마다 성도들이 목사의 축복을 기다리며 새벽 기도를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목회자가 중병(重病)에 걸리자 성도들은 이른바 ‘시험’에 들었다고 한다. 이런 예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 교회 무지렁이 성도들은 교회당을 신전(神殿)으로 알고 헌금을 제물로 여기며 목사를 복 빌어주는 제사장으로 주일을 성일(聖日)로 착각한다. 주일 아침이 되면 수백만이 거의 같은 시간 ‘대예배’ 축복 의식에 참여하려고 움직인다. 속고 속는 이 일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교회당은 오직 진지하게 성경의 진리를 배우는 진리의 전당으로 거듭나길 간구한다.
과거 여름방학이 다가오면 대학생 기독선교회는 여름성경학교 지원 준비로, 그리고 각 교회의 교회학교도 여름성경학교 채비로 분주했다. 곳곳에 ‘여름성경학교’ 플래카드가 걸렸다. 이제는 거의 볼 수 없다. 교회학교가 사라졌다는 증거다. 그렇다고 문자 알림을 비롯한 SNS 공지가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가 60%가 된다는 조사는 몇년 전에 들었던 바다. 한마디로 성경진리의 전당으로서 교회의 미래는 암울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잘 진단할 필요가 있다. 성도가 있다면 즉 장년부가 있다면 소속된 교회에서 (비록 규모는 작아질 수 있지만) 아들과 딸이 없을까? 손자와 손녀가 없을까? 한 명이면 교회학교 문을 닫아야 하고 열 명쯤 되어야 교회학교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중요한 것은 인원수와 규모가 결코 아닌데 말이다. 문제는 진리의 내용이다. 그런데 목회의 방향을 ‘사람 수=교회부흥=건물시가=연보액수=축복=연봉=판공비 규모’라는 정말로 사단의 종노릇하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사익(私益) 추구의 수단으로 삼는 이 정신 나간 등식에 맞춘다면, 교회학교에서 자라는 진리에 목마른 한 영혼의 어린 생명이 보이겠는가?
그런데 진리로 양육하는 것에는 어떤 관심도 없다가, 교회학교 학생이 자라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 그때부터 다시 관심을 보이며 교회에 충성하라는 권고는 정말이지 뻔뻔하기 그지없다. 진리에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힘겨운 사회생활의 원인을 신앙생활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거짓 지도자의 협박을 듣는 순간, 부모가 받았던 축복과 저주의 악순환은 자식에게도 반복된다. 악순환의 고리 중 빨리 벗어나야 하는 것이 ‘목사의 축(복 기)도권’에 대한 명확인 인식이다. 목회자도 자신도 알고 있는 자신에게도 없는 축복을 거래하듯이 남발하지 말고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무한한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연구해서 가르치는 일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불법이 성행하는 바로 그 자리가 이미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엄정한 심판이 내리고 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다. 성경적 권위 아닌 거짓 것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훼손한다면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심판이 어찌 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요한복음 마지막 21장에는 승천하기 직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때 자신을 버리고 배반했던 제자 베드로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세 번 질문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양을 잘 먹이고 돌보라는 부탁을 하신다. 베드로에게 양의 ‘소유권 이전’을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양이므로 그리스도의 진리로 잘 양육할 것을 언약하시면서 당부하신 내용이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경우 작금의 상황은 수십 년 아니 수년이라도 진리로 그리스도의 양으로 잘 양육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가 쓰기에 적당하도록 길들여 자신의 소유로 삼아 결국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말세에 나타날 속고 속이는 일이 너무도 팽배하여 이대로 한국 교회에 주신 진리는 끝나고 있는 것인가를 되풀이하게 한다. 목사는 진리의 전당을 사수하는 성경진리의 교사이며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하나든 둘이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주신 힘들고 나약하고 지친 영혼을 진리로 소생시키기 위한 진리전파 이상 이하의 일은 없다. 아무리 없다고 해도 내 가족의 영혼들은 있지 않은가? 바로 그 가정교회의 현장이 다름 아닌 진리전파의 모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해 주신 중요한 예언을 왜 목사에게 축도권이 있어서는 안 되는지 아래의 말씀과 함께 고민하며 세속적 불이익이 따르더라고 성경진리의 방향으로 가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10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목자들을 대적하여 내 양의 무리를 그들의 손에서 찾으리니 목자들이 양을 먹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이 다시는 자기를 먹이지 못할지라 내가 내 양을 그들의 입에서 건져내어서 다시는 그 식물이 되지 않게 하리라 1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지라(겔 34:10~15).


에스겔에 해 주신 언약대로 구약의 모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신약교회로 성취되었으며 양무리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 되신다. 그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다. 성도를 축복을 하든 저주를 하든 그 일은 성도의 주인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절대적 권한이 있으며, 성경진리를 전하라고 세워준 목사에게는 축복과 저주는 무관한 일이다. 성전이니 제사장이니 제물이니 하며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를 더 이상 욕보이는 심판을 자처하지 말고 축도권의 허구를 중지하길 바란다. 성도들도 전리의 전당에서 올바르게 성경진리를 배우는 데 전념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에 몰두해야지, 목사 자신에게도 내리지 못하는 허구와 조작의 ‘축도’를 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목사를 성경진리의 사명자로 바로 세우는 일의 절반은 성도들의 관심이 좌우한다. 베뢰아 성도들처럼 전하는 내용의 진리 여부를 반드시 성경적인지 아닌지 확인하는 일에 몰두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도 성도에게 진리로 먹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축도권의 허구를 쓸 생각하지 말고, 더 이상 양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삼가야 할 것이다. 교회의 유일한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이 ‘목회’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축도(축복기도)’의 허구에서 벗어나기 1
종교개혁 정신의 원형찾기 Ⅳ : ‘여호와증인’이 왜곡한 이름 ‘여호와’ 회복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