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특별기획

 
작성일 : 21-03-15 21:2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자의 눈으로 본 교회개혁의 대안 I


현재 한국 기독교는 여러모로 위기에 처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로운 긍휼하심보다 엄격한 진노의 과정으로 보이는 것이 더 많아 보인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의 확산 속에 그나마 방역을 잘하는 상징처럼 보이는 한국이지만 한국 내의 정치적이며 경제적인 상황은 좌절과 절망적인 분위기로 보인다. 한국 교회도 국가 방역 조치를 무작정 따르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그렇다고 방역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하는 것도 또한 부적절한 처사일 것이다. 기자의 눈에는 이러한 코로나19 대유행의 격랑 속에서 한국 교회의 개혁을 말한다는 것은 그리 편하지는 않다. 개혁은 비판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기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한국 교회에 대해 그 문제점을 다시 지적한다는 것은 아픈 상처를 할퀴어 더 고통스러운 생채기를 내는 고약한 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는 해방과 자유는 어디까지나 영적 문제가 본질이기  때문에 시대 상황이 어떠하든 외적 규모와 정황과도 상관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절대표지인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토대를 둬야 함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한국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총 가운데 코로나19 대유행 병의 확산 속에서도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더욱 묵상하며 각자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진리를 향한 몸부림으로 성도로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성도들이 많다고 본다. 귀하고 소중한 환경으로 보면 이러한 진리 탐구의 환경은 현재 그리고 차세대에 ‘가정교회’가 그 출발이어야 함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1. 보혜사 성령의 사역은 성경진리에 바탕을 둔 가정교회를 설립하신다

‘보혜사 성령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교통하게 하시는 사역’(고후 13:13 참조)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설립하게 한다. 그런데 진리의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필연적으로’ 세우는 교회는 어디서 시작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신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기자는 그중에서 바울 사도가 진리의 말씀으로 낳은 어린 동역자 디모데와 연관 짓고자 한다. 바울 사도의 유언장과도 같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방식의 말씀에는 디모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 3 (……)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2-5)
모든 가정교회를 디모데의 경우처럼 일반화할 수 없다. 각각의 경우가 핵심이 아니라 아들과 같은 어린 동역자 디모데의 경우, 어머니의 어머니인 외할머니로부터 어머니 그리고 디모데까지 삼대로 이어지는 성경진리에 대한 귀한 전승(傳承)이 본문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본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가정교회 환경 속에서 성경 교육을 받았던 디모데의 경우에 대해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딤후 3:15)다고 확인해 주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회사를 보더라도 할머니의 영향을 받고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신앙의 선배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현대의 한국 교회에서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성경진리를 가르쳤고 그 어머니가 다시 아들에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해주었다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점점 사라지는 성경 교육은 애달픈 우리의 현실이다. 아버지 쪽이든 어머니 쪽이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가운데 조부모 네 분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로부터 성경을 배우는 가정교회의 기적과 같은 부흥이 일어나길 바란다.

2. 가정교회가 폐교 위기에 처한 교회학교의 대안이다

우리의 학교 교육 현장은 일 년 전 코로나19 사태를 직면한 후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비대면 교육 환경과 여건이 거의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과는 달리 교회학교의 성경 교육 환경은 더 피폐해졌다. 그나마 어렵게 운영했던 주일날 성경학교는 거의 존폐 위기에 직면해 있다. 세상의 학교 교육보다 먼저 앞서야 할 교회학교 성경 교육이 코로나19 사태로 교회학교 ‘폐교’라는 상황으로 빠르게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입시와 진학을 위해 쏟아붓는 사교육비에 비하면, 교회학교는 한 푼의 교육비 지출 없이 단지 교회에 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는 교회학교를 폐교 위기로 몰아가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로서도 자녀 교육에서 성경 교육의 중요성을 거듭 눈뜨면서 자녀들에게 호소 아닌 호소로 강요가 아닌 전달자로서 조심스럽게 소개한다. 분명한 사실은 부모의 입을 통해 자녀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받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그 차이가, 감히 말하건대, ‘생/사’의 중요한 만큼 크다고 본다. 엄격하게 말한다면, 가정교회에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닫게도 하시지만 그렇지 않게도 하신다. 전달된 말씀이 믿어지게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얼마든지 발생한다.
교회학교의 미래에 대해 암울하게 보는 이 시점에서 가정교회는 유일한 대안임이 틀림없다고 본다. 진리의 말씀을 전해주는 가족 구성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것과 전혀 없는 것의 차이는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라고 본다. 바울 사도의 교회 문안 인사를 보면 많은 무리에게 보내는 것도 있지만 소규모의 가정교회가 그 수신자인 경우도 많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고린도 교회에 대해 아시아에 있던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 간절히 문안”(고전 16:19)한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는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골 4:15)을 부탁한다. 바울 사도의 제자이자 동역자인 빌레몬에게는 이렇게 안부를 묻는다.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몬 1:1-2)한다고 한다. 가정교회는 교회학교 폐교 위기로 치닫는 다급한 상황의 마지막 대안이라고 본다.
3. 가정교회는 혈연과 규모를 초월한 여호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신 자신이 세우는 교회의 규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말씀하신 ‘두세 사람’은 혈연도 포함하지만 동시에 혈연관계를 초월하는 구성원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주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왕과 신하, 승리자와 패배자 등등 차별 내지 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구성원에서는 어떤 장애가 될 수 없다. 진리의 말씀으로 소통하게 하시는 주의 몸 된 교회는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게 했던 모든 전통과 관습들을 철폐하게 하신다. 세상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상명하복의 계급구조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결코 앞서갈 수도 없으며 높은 지위에서 군림할 수도 없다. 그런데 작금의 한국 교회를 보면 교회가 오히려 세상 권력 구조 안에 들어가려는 참으로 볼썽사나운 광경들이 많이 일어난다. 최고 통치자를 만나거나 권력 기관을 기웃거리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상 법에 종속시키는 일이 허다하다. 하나님의 교회가 이러한 모양새를 보인다는 것은 교회의 본질로부터 많이 멀어진 것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시고 성도들은 지체(肢體)이다. 그리고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가장 작은 단위의 ‘지교회(支敎會)’가 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는 목사 중심의 교회를 세우다가 바로 지교회의 원천인 ‘가정교회’를 허무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 개혁의 진척(進陟) 정도를 평가할 때 분명한 증거는 가정교회의 회복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두세 사람’이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토대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데는 어떤 문제도 없다. 중요한 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성경진리에 얼마나 확고한 토대를 둔 교회이냐가 관건(關鍵)이다. 나이 많은 장로 요한 사도는 진리로 함께하는 소수의 가정교회에 대해 그러한 성도를 마주하는 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는 것과 같은 소중한 일임을 알려준다. 진리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하는 것은 그대로 끝나지 않고 반드시 성도와 성도를 만나게 한다. 억지로 모이라고 하는 제도와 형식을 따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이 1:12)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요삼 1:13-14) 두세 사람이 진리의 말씀으로 함께한다면 (그 방식이 대면이든 비대면이든, 목소리이든 영상이든 모든 것을 초월하여) 바로 그것이 진리의 말씀으로 한국 교회가 개혁되고 있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된다고 본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배윤리 권사 (교회동역자협회 / 객원기자)

정확한 진단과 올바른 대안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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