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3-19 19:3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역사비평학(성서고등비평학) 비판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특별기획 심층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성경권위를 훼손하는 역사비평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여 성경신학이 어떻
게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교계에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
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원전(原典)이 없으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는 불충분한가?

객원기자  현대 역사비평학자들은 성경의 원전이 없다는 사실을 성경권위의 결정적 결함으로 봅니다. 인간의 상식에 호소한다면 이 말은 매우 타당한 지적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는 인간의 상식적 판단으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들이 원전이 없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의도는 성경은 결국 인간 문서의 수집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의도에 대해 우리는 성경의 원저자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분명히 강조하고 확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관점을 결코 놓치지 말이야 하는 이유는 성경을 해석할 때 인간 중심(인본주의)이 아닌 하나님 계시 중심으로 보며 모든 해석을 보혜사 성령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느냐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맹목적으로 성경은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결코 모순이 없는 논리적으로 일관된 통일성 있는 진리임을 확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을 통해 성경만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역사비평학의 어설프고도 사악한 의도를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P연구생  저는 좌담회를 할 때마다 역사비평학자들의 주장을 보면서 어떨 때는 저런 시시콜콜한 물음에 대답할 가치가 있는가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신학을 통해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며 여호와께서 살아계셔서 모든 것을 작정하신 대로 섭리하신다는 것을 (맹신이 아니라) 확증하여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강요에 의해 믿거나 혹은 각각 자기 욕심에 따라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성경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인지의 여부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봅니다.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성경을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 없도록 하는 사건은 분명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주권으로서 믿지 못할 자에게는 심판의 역사이고, 믿을 자에게는 무한한 은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싸움 즉 진리 투쟁을 위해서 이러한 좌담회를 합니다. 이 역시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시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켜갈 수 있는 용기와 소원을 주신다고 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조금 전에 맹신과 확신에 대해 구분했는데 성경관 혹은 성경 해석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봅니다. 맞습니다. 저도 성경신학을 60평생 연구한 사람으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 해석은 오직 보혜사 성령의 사역이며 저에게는 무한한 은총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를 완간할 때까지 그러한 큰 작업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것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능력의 영광에 대해 더욱 확신을 주시는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역사비평학자들이 대부분 ‘문자주의’의 노예라고 봅니다. 성경의 전체의미를 확인하지 못하고 한 자 한 자 맹목적인 관습으로 믿어온 결과로 성경 내용 몇 군데가 모순으로 드러나자 문자주의 성경관이 무너진 경우라고 봅니다. 문자주의에 대한 맹신은 반드시 성경에 대한 비난으로 끝납니다. 자신이 속았다는 분노 때문에 성경을 얼마나 싫어하겠습니까. 이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말씀(logos)’의 뜻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이 원인이라고 봅니다. 물론 앞서 연구생의 지적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말씀’이라는 말을 이해할 때 우선 문자주의에 함몰되면 성경을 신적 권위가 담긴 진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이라고 할 때 단지 문자로 이해하면 성경을 인간 문서화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말씀은 성경 전체에 담긴 통일된 의미를 말합니다.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수 천 가지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 모든 사건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처음 기록부터 지금 우리가 한글로 성경을 보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것을 간단하게 말하면 ‘말씀의 능력’ 혹은 ‘말씀의 운동력’(히 4:12)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전이 없고 필사본만 있으므로 성경의 신적 권위는 없다고 주장하려는 의도는 제가 볼 때 맹신과 무지의 소치입니다. 원전 기록을 주관하신 성령 하나님이나 지금 우리가 보는 한글 성경을 해석하고 깨닫게 하는 성령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몇 글자가 다르다고 해서 본래 ‘의미’가 결정적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제가 60 평생 성경을 연구하면서 사용한 책이 한글 개역성경입니다. 사본 상의 오류가 무엇인지 그 내용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훼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박홍기 연구원  그래서 원로연구원께서는 성경신학총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성경개론을 『의미분석 성경개론』(진리의말씀사, 2005)이라고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의미분석이란 제목이 역사비평학의 문자주의를 비판하는 자리인 만큼 그 의미를 더한다고 봅니다. 성경에는 수 천 가지 사건이 있고 수많은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부터 예수 그리스도, 천사와 사단 그리고 각종 피조물에 이르는 그야말로 수 만 명의 인물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문자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유일한 본 주어와 마지막 서술어인 ‘여호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문자와 내용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수 천 가지 사건에 담긴 ‘의미’를 모순 없이 일관된 의미와 통일된 체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확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은 ‘의미분석’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가령 구약은 ‘여호와의 언약’, 신약은 ‘그리스도 성취’이며, 이러한 의미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그리고 마태복음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여호와의 존재를 확증하고 있습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의미분석’에 대해 좀 더 강조한다면, 원전이 없어도 성경권위는 아무런 손상을 받지 않는다고 봅니다. 가령 군대에 간 아들이 모진 훈련을 받으면서 쓴 편지가 비에 젖어 상당 부분 내용을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편지를 받아 보는 부모님은 그 편지에 담긴 의미를 통해 아들이 어떤 내용을 쓰고 있는지, 왜 ‘부모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현재 우리에게 남겨진 필사본과 번역본으로도 성령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알기에 충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현재 보고 있는 성경을 놓고 왜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는 공개토론회를 제안하고 싶을 만큼 확신이 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가령 원전이 있다고 해봅시다. 원전이 있다고 자동적으로 성령 하나님의 본래 기록 목적이 드러날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수 천 년 동안 보존해 온 권위 있는 구약 성경을 성전에 보관하고 몸에 새기고 다녔지만 눈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눈앞에 원전이 있다고 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원전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역사비평학자들 혹은 문서설자들은 오만의 극치이자 그러한 주장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심판의 과정에 성경신학은 투쟁의 무기 역할을 하리라고 봅니다. 

K연구생  한국 교회 성도들이 성경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문자주의에 빠진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초교파적으로 한국 교회는 성경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목적이 성경을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마치 부적처럼 천국가려면 성경을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 마치 기차표처럼 여기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문자주의는 결국 기차표나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면서 교회에 올 때는 꼭 가지고 와야 하는 그래야 하나님이 ‘착하다’고 보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하신다는 그야말로 어린아이보다 못한 유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합니다. 참으로 서글프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이렇게 보면 기계적 혹은 축자영감설에 의한 문자주의 그리고 맹목적인 내용주입은 하나님의 존재 확증과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확정한 영원한 구원의 복음, 생명의 말씀을 왜곡하는 ‘독약’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의미분석 성경개론’을 통해 ‘해독제’를 맞았다고 봅니다.
2. 성경의 필사본(筆寫本)은 단지 인간 문서인가?

J연구생  맞습니다. ‘해독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권위와 관련된 다른 문제를 생각해 봐도 해독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은 현재 필사본만 있기 때문에 성경권위가 충분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극히 인간중심적 판단입니다. 원본이든 필사본이든 번역본 모든 성경은 보혜사 성령께서 원저자이십니다. 기록하게 하시고 보존하게 하시며 또한 깨닫게도 하셔야 성도인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고, 그 결과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확인하고 그를 경외할 수 있습니다.
성경기록은 그 기록 당시마다 역사적 환경과 기록 배경이 있습니다. 그 모든 상황을 지배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기록한 내용을 시대마다 택한 백성에게 깨닫게 하실 때도 기록 내용과 환경을 통해서 이해하도록 섭리하십니다. 얼마만큼 이해하게 할 것인지 그 깊이와 정도도 성령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조금 전 어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시대에 역사비평학자들이 성경을 난도질하려는 것도, 우리의 투쟁의 대상이긴 하지만,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는 것도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증거로 보입니다. 물론 그들의 비판에 대답할 수 있어야 제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저는 성령께서 필사본을 지속적으로 남겨주셔서 지금은 ‘의미분석 성경개론’으로 일관된 진리체계로 확증하여 한글번역 성경을 통해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필사본은 원전훼손이 아니라 원전을 보존하시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봅니다. 

3. 정경(正經)과 위서(僞書)의 궁극적 판단자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시다 !

객원기자  필사본이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며 주권이고 은혜라는 말이 깊은 인상을 줍니다. 물론 여기에는 성경 전체의 일관되고 통일된 의미를 밝혀준 ‘의미분석 성경개론’이 그 주장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비평학자들의 또 다른 주장을 반박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들은 사도 시대 이후에 수 백 권의 예수님 관련 기록들 중에서 어떻게 27권만 정경(正經)이 될 수 있느냐고 비판하면서, 27권 선택은 사람들이 결정했기 때문에 다분히 인위적이며 그래서 성경의 신적 권위는 없다고 비판합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시며, 보존자와 해석자, 번역자도 모두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아래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경과 위서의 구분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그렇다고 봅니다. 성령 하나님은 필사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 시대에 깨닫게 할 자들의 품에 안겨주셨습니다. 그래서 필사본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주권이며 은혜인 방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볼 수 없다면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한 인위적 선택의 결과로 밖에 보이지 않겠죠. 그런데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진리 전파의 역사를 오해하는 면이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성경을 깨닫게도 하시지만 깨닫지 못하게도 하십니다. 앞서 어느 분이 눈앞에 구약에서 약속한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셨는데 늘 구약을 읽고 메시야를 기다리던 바로 그 유대 민족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비슷한 예가 종교개혁 이후의 서구신학이라고 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 이후 수 많은 성경학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구신학의 현주소는 문서설과 역사비평학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보다 아직도 성경을 많이 보고 있는 한국 교회 성도들을 서양인들이 이상하게 볼 정도라고 합니다. 마치 ‘왜 아직도 성경을 보고 있지?’하며 신기해합니다. 이 말은 서양인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라는 어떤 여지도 남아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서구신학의 수백 년 노력에도 불구하고 서구신학에서 성경의 권위는 나날이 추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 우리는 ‘의미분석 성경개론’을 통해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정경과 위서의 판단은 간단하게 말하면 원저자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의 결과입니다. 현재 27권으로 보존되는 신약성경이 여러 증거와 종교회의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성경신학은 이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해 가신 성령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예를 들어 18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로도비코 안토니오 무라토리’가 라틴어로 된 ‘신약성서’ 문헌목록을 발견했습니다. ‘무라토리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용은 2세기에 누군가가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시기는 주후 95년경 요한계시록이 기록되고 난 후 누군가에 의해서 현재 27권과 거의 비슷한 목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신학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원저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정경을 확정해주신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은 그 이후 주후 367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감독 아타나시우스를 중심으로 신약 정경 27권을 확정하는데 많은 기여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사람들이 모인 종교회의가 결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역사의 주관자는 성경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정경 확립의 역사에 대해서 의미 있는 사건이 많지만 다음에 더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초대교회 당시 정경 확정 과정에 등장했던 수 백 가지의 위서(僞書)들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럴듯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마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점령하려고 포진했던 수많은 원주민과 제국들이 생각납니다. 예루살렘 주위 상하좌우 사방팔방으로 적군이 있었던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약속대로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모의하여 죽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을 통해 그 신분을 아버지의 아들로 삼아주셨습니다. 지금 저희들이 보고 있는 27권이 정경으로 확정되는 과정은 앞의 사례처럼 전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의 계시이며 생명력 충만한 ‘말씀운동(히 4:12)’의 증거로 보입니다. 역사적 과정을 통해 정경이 확정되는 과정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정경(正經)과 위서(僞書)의 궁극적 판단자는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라고 확신합니다.   

4. 정통(正統)과 이단(異端)의 판단 기준은 오직 성경이다 !

S연구생  역사비평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이나 디모데전서 2장 11절에 나타난 여자의 순종 내용을 근거로 성경권위가 없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누군가가 삽입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좌담회를 통해서 볼 때 정말로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원저자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표면적인 주어에 얽매인 기계적 영감설과 문자주의에 함몰된 대표적인 예로 보입니다.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 전체 맥락과 의미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여호와 계시 중심의 ‘의미분석 성경개론’의 중요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은 자신들의 이해의 틀 속에 들어오지 않으면 억측과 상식으로 성경본문을 넣었다 뺐다 합니다. 모르면 그냥 모른다고 하면 될 텐데, 정말이지 성경의 저자이시며 보호자이신 성령의 엄중한 심판을 그들을 통해서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성경해석의 원칙은 문법적, 역사적 그리고 신학적 해석의 순서를 따라갑니다. 이 모든 과정을 성경신학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으로 봅니다. 기록한 내용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게 하는 것 또한 보혜사 성령의 은총으로만 가능합니다. 성경에 대한 역사배경을 연구한 학자들이 어디 한 둘입니까?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그 내용에 담긴 의미를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확증으로 인도하시는 능력은 전적으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섭리하지 않으시면 성경 본래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누구나 기계적 영감설자가 되고 문자주의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약의 모든 성경 기록이 그 당시 사건을 배경으로 삼지만 그 사건에 나타난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호와 계시 중심으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 내용에 얽매이고 그래서 문자주의로 전락한다는 말입니다. 성경 전체를 입체적으로 보면 지금의 성경은 그 배열이 있어야할 위치에 정확하게 위치하고 있는 정경임에 틀림없습니다. 전체 주어를 여호와 하나님으로 확증하지 못하면 성경은 결코 절대진리로 확증할 수 없습니다. 가령 어떤 민족에게는 적절한 단어가 없어서 어떤 부분을 정확하게 번역하지 못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요한복음 21장 25절에 보면 성경 기록의 분량을 조정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기록한 양이나 글자의 정확성이 정경과 위경의 절대적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 기록에 담긴 바른 의미를 일관된 진리체계로 확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바르게 믿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60평생 이러한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성경신학총서를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가끔 자문자답합니다. 문서설과 역사비평학이 신학계를 지배하는 바로 이 시기에 왜 성경신학이 등장했을까? 우리 시대에 영원한 절대 진리의 말씀이 성경밖에 없음을 알게 하시려고 성경신학을 통해 역사하신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감격할 뿐입니다. 성경신학을 통해서 비진리와 투쟁하게 된 상황이 하나님의 능력과 존재를 계시하시는 역사적 상황이라고 봅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정통과 이단은 분명 인간이 관여한 역사적 사건이므로 정경을 선택한 것은 특정한 종교집단이 아닌가? 간단히 말하면, 이 자체도 말씀운동의 역사적 결과입니다. 믿을 자와 믿지 못할 자를 성령께서 판정하십니다.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일이 잘못이건 옳은 것이건 모두 성령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성령께서 바른 진리를 알게 하여 바른 지도자가 모이면 성경진리를 보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비진리를 추종하는 종교회의라면 그 결과는 성경진리를 훼손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나타난 원래의 뜻이 훼손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에게 깨닫지 못하게 하시고 알지 못하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존재는 여전히 분명합니다. 우리 성경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경외합니다. 성경신학은 문자주의 신봉자도 아니며 내용에 대한 맹목적인 맹신자도 아닙니다. 성경의 권위를 우리가 지킨다는 자칭 개혁의지론자도 아닙니다. 성경의 원저자이신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외할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증시켜 주신 무한한 은혜에 단지 무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질그릇에 담아주신 보화를 땅에 묻어두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을 받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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