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7-08-15 18:2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좋은 책’: 신을 정확하게 죽이는 책!


“나 자신의 때가 아직은 오지 않았다. 몇몇 사람은 사후에야 태어나는 법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 KGW 6, 298쪽) 이 인용은 니체가 자신이 이미 저술한 책에 대해 서평 한 내용이다. 책의 제목부터 관심을 끈다. ‘이 사람을 보라’는 말은 짐작하건대 니체가 기독교 가정에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루터교의 엄격한 신앙 지도를 받으면서 성장한 것을 배경으로 하는 듯하다. 「요한복음」에 보면 같은 말이 나온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 사람을 보라!’(요 1:29,36)고 외쳤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예수님의 생애와 관련지으며 자기 책을 이렇게 평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라고.

니체가 말하는 ‘좋은 책’은 잘 팔려나가 그 시대에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품은 아니다. 사실 니체의 책은 그 당시에 혹평 중에 혹평을 받았다. 시대정신이나 상식이나 유행하는 문화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책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의 죽음(1900년) 후 한 세기가 지날 즘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다양성을 표지로 하는 오늘날 모든 지성과 문화를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니체를 인용하지 않으면 입을 뗄 수 없고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니체는 우리 시대를 지배한다. 니체가 스스로 물었던 ‘왜 그렇게 좋은 책을 쓰는지’에 대한 답은, 니체가 ‘그 시대와 불화하면서 다음 세대에 필수적인 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좋은 책은 당대에는 부조화의 원인이 되지만 미래의 삶을 준비하고 예견할 수 있는 통찰(洞察)을 지닌 기록이라고 할 수도 있다. 통찰력이란 사건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주어진 시대에 맞게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렇게 보면 니체는 좋은 책을 쓴 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니체 글을 인용하거나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가 쓴 ‘좋은 책’은 의미심장한 전제를 깔고 있다. 절대 진리 혹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전면적 거부(拒否) 내지 부인(否認)이 니체가 쓴 ‘좋은 책’의 근본 전제다. 현대는 니체의 명제 ‘신은 죽었다’라는 가설 위에 세워진 시대다. 현실공간이든 가상공간이든 모든 디지털 코드의 조합은 신의 죽음을 부르짖는 신호들로 꽉 차 있다. 절대 진리의 부정, 유일신의 부정, 영원불변의 가치 부정 등 성경에서 밝힌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모두 부정하는 시대가 현대다. 하나님의 전능성은 슈퍼컴퓨터와 인조인간의 전능성이 대체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신뢰성은 이 세상에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이데올로기로 폐기해야 할 적폐다. 신의 절대주권적 통치는 종교적 억압을 의미하며, 신의 자비성은 각종 편리를 제공하는 사회보장제도가 대체한다. 기독교만 진정한 구원이 있다는 주장을 많은 나라에서는 독단적 명제로 규정하고 기독교 국가마저도 기독교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개인인권법’으로 처벌받는 시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니체가 쓴 신이 죽은 시대에 필요한 ‘좋은 책’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절대가치이며 영원불변의 존재이신 하나님의 죽음을 예견한 니체의 말대로, 우리 시대가 경험하는 온갖 징후들과 징조들은 니체가 예견한 바임을 인정해야 한다. 니체는 자기 시대뿐 아니라 ‘신의 죽음’이 일상화되는 다음 시대를 예견했던 ‘좋은 책’의 저자다. 유럽 기독교의 신을 정확하게 죽였기 때문에 좋은 책을 쓸 수 있었다. 책을 쓴 주체가 본래 없다는 의미를 담은 ‘저자(著者)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시대정신을 구태여 강조하지 않더라도, ‘성경책의 죽음’도 신의 죽음과 함께 필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대한민국 ‘성경공회’는 계속해서 요리조리 번역하고 편집해서 이쁜 모양의 성경책을 출판하지만, 한국 성도들에게 권위 있는 절대 진리로서 성경 말씀이 허섭스레기가 된 지는 오래다.

감히 비교하기에는 불경스럽기까지 하지만, 니체가 받았던 오해와는 비교할 수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시대에 철저히 비난받고 배척당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러한 극적인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기록했지만 동일한 의미를 지닌 통일된 진리를 확증해 주는 진리가 복음서(마태복음~사도행전 1장 11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분으로 살면서 배척받고 죽은 사건은 당대 유대인과 결코 조화할 수 없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예수님의 배척과 고난, 죽음과 부활은 이미 구약 성경 전체의 역사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바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신의 죽음’이 아니라 구약 나아가 창세전에 언약하신 사건이 그대로 역사적 사실로 성취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사건이 언약대로 이루어진 방식으로 구성된 성경은 시대와 불화를 겪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도 이미 창세전 그리고 구약의 예언된 사건의 성취에 속한다.

신의 죽음이 지배하는 현재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유럽식 기독교의 종언(終焉)과 함께 이제는 한국 교회도 겪어야 할 진리의 종말을 예고하는 징조일 가능성이 크다. ‘좋은 책’은 진리를 담아야 한다. 그런데 진리는 인간의 정서에 호소하지 않는다. 시대정신과 결코 혼합될 수 없는 질적 차이를 야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그야말로 절대 진리를 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좋은 책’이다. 왜냐하면 ‘신의 죽음’을 발설하는 이 시대의 모든 아우성에 역행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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