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1-31 22:0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가 본 노동: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


“숨 가쁘게 서두르는 그들(미국인-필자 주)의 노동-신세계의 고유한 악습(필자 강조)-은 늙은 유럽에서도 이미 감염되어 이곳을 야만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기이한 정신 결여증을 퍼뜨리기 시작했다.”(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KGW V 2, 『즐거운 학문』, 329, 안성찬·홍사현 옮김, 서울: 책세상, 2005, 297쪽)

이른바 ‘골드러시(gold rush)’에 정신이 나가버려 최소한의 삶의 여유도 모두  상실한 미국식 노동의 굴레를 니체가 비판하고 있다. 19세기 중반부터 이후 한 세기 동안 ‘노다지 대박’에 홀린 미국인들을 지배하는 노동의 본질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 결여증’이란 노동은 본래 최소한의 여유로움도 허락하지 않고 삶을 힘겨운 노동으로 송두리째 불살라 버리는 악질적 본성을 지녔다는 점을 지적하는 말이다. 일 마치면 쉴 수 있다고 말하지만 결코 쉴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노동이다. 쉬라고 독려하지만 결국 쉬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고 죄악시하게 만든다. 이 말이 틀리지도 않게 들리는 이유는, 대박의 꿈을 안겨줄 ‘노다지’를 눈앞에 두고 어떻게 잠을 잘 수가 있고 쉴 수가 있단 말인가?       
노다지 대박의 헛된 꿈을 꾸게 하는 노동은 생존을 위한 고통의 무한 인내를 강요한다. 한가로움은 죄악시된다. 대통령 공약(公約) ‘일자리 창출’은 전 국민의 노예화를 숨기고 있다. 노동의 존엄성, 신성한 가치, 자기실현 등 모두 조작된 말들이며 대자본은 저인망 그물로 모든 국민의 신체와 정신까지 일체 쓸어 담아 자신들의 부품공장의 소모품으로 삼아버린다. 실업률이 낮아졌다고 경제 분야 장관들이 나와 자랑스럽게 떠벌린다. 니체는 이러한 몰인정한 미국식 자본주의의 노동 구조에 대해, 현대 사회를 가장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최고의 경찰력’(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KGW V 1, 『아침놀』 제3권, 173, 박찬국 옮김, 서울: 책세상, 2004, 191쪽)이라고 혹평한다.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한 생존 혹은 미래에 보장될 여유로움을 미끼로 잔인한 톱니바퀴에 끼여 돌아가는 처참한 인생에게 무한 인내를 요구하는 노동현장에서 소위 노동을 놀이처럼 하면 된다는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띄우기는 현대의 가장 큰 허구다. 
노동이 멈추는 곳 바로 그곳에서 ‘자유’가 시작한다고 한다. 거짓이다. 노동의 구조는 멈추도록 짜여진 것이 아니라 모든 힘이 소진되고 죽어야 끝나는 구조다. 단지 이익 추구를 위해 한두 푼 더 버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말고 자아실현의 정신적 상승을 도모하면서 스스로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라고 쉽게 말한다. 그런데 노동의 톱니바퀴 속에서 짓이겨져 망가져버려 어깨를 아무리 두드리며 다독인다고 해도 그 이상 보장되는 미래는 또 다른 더 힘겨운 노동의 굴레의 반복일 뿐이다.
노동에 대한 대가는 더 즐거운 노동을 위한 행복한 보상이 될 수 없다. 발발 떠는 손에 움켜쥔 ‘급여명세서’는 단지 노동하는 자신이 현대 자본주의 시장의 노예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확증하는 ‘노비문신’ 역할을 한다.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그냥 있으면 더 비참한 노예가 되기 때문에 그것이라도 철저하게 받아 챙기는 것이지, 이른바 ‘신성한 노동의 대가’라는 말은 노동의 잔인한 논리를 포장하는 말이다. 내 삶을 완벽하게 속이면서 나를 점점 비참한 현대판 노예로 만드는 빼도 박도 못 하는 증거가 바로 노동의 대가, 급여명세서다.
니체가 이렇게 진단한 비참한 자본주의 노동에 대해 창조주를 믿고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믿는 우리는 노동에 대한 다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의 노동은 처음에 ‘축복’으로 시작했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복(福)을 주시면서’ 생육과 번성, 땅의 경작과 정복 그리고 만물의 통치를 은혜로 언약하셨다. 하나님께 받은 복은 인류가 무엇인가 다시 만들어가야 할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무엇인가 인간이 만들어야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이것은 ‘복’이 될 수 없다) 명시한 것처럼 복으로 은혜로 공짜로 받는 것이다.  물론 옛 뱀인 사단의 유혹으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복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바뀐다. 땀을 흘려야 하고 또한 땀 흘린 만큼 소출이 그만큼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땀을 흘리는 것을 괴롭게만 본다면 그냥 ‘생고생’하는 것을 복이라고 할 수는 없을 터, 노동의 수고는 타락과 추방 전에 받은 ‘복’의 실현 확증과 하나님의 방식대로 복 주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노동의 땀을 흘리는 의미를 피조물인 인간의 이익추구와 욕구 만족에다 두면 고통스러운 노동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노동의 의미는 수고의 땀방울을 명하신 창조주 되신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그를 알고 경외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한다.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철저하게 온몸으로 배워가야 하는 데 노동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단계에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노동 현장보다 더욱 뼈저리게 겪으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서 ‘복’을 깨달아가야 한다. 우선 노동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을 배워가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에 대한 수익의 많고 적음이 노동의 본질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이미 ‘복’으로 주실 바를 정해놓으신 분이다. ‘받은 바 복’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의 대가에만 몰입하는 인간의 노동 구조는 노동에서 결코 쉼과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하와가 짊어져야 하는 노동의 수고와 상관없이 타락 전 받은 ‘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복’은 무엇인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온몸에 인간의 모든 수고를 짊어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19).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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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물을 줄 알아야
어진 이가 예를 지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