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5-23 19:4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열. 러시아 대공국의 동방 정교회 :‘제3의 로마’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창 10:2)

1. 중세 야벳 문화의 마지막 후예 :
  모스크바와 동방 정교회   

 앞의 성경 구절에는 노아의 둘째 아들 야벳의 일곱 아들이 등장한다. 야벳의 종족 번식은 문화사적으로 통상 흑해 기준으로 서쪽으로는 에게해와 지중해 북부의 헬라 반도와 이베리아 반도로 이어진다고 본다. 그리고 흑해 북동쪽으로는 카스피해 북부와 러시아 전역으로 번성하여 그 영토를 넓혔다고 본다. 흑해는 헬라 반도의 에게해와 맞닿아 있다. 그 정중앙에 바로 1453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망한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있었다.
앞서 인용한 창세기 10장 2절의 두발과 메섹은 흑해 북동쪽의 슬라브어를 구사하는 러시아의 조상들이라고 일컫는다는 데 큰 이견은 없다. 어쨌든 러시아는 흑해 동북쪽에 위치한 야벳 종족의 후예들이다.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수도 키예프)와 벨로루스에 대해 중세 동로마제국 시절부터 오랜 긴장관계를 형성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멸망 후에 정치와 종교의 패권이 모스크바로 넘어가게 되면서 흑해와 카스피해 북부의 지배권을 거머쥔다.
우리는 야벳 족의 후예인 서양의 ‘지혜(소피아)’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극동 셈족의 후예인 이곳 한국 교회에까지 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 필연성의 역사를 ‘로고스의 운동력(히 4:12)’의 관점에서 개관하고 있다. 중세 말 서유럽에서 흔들리기 시작하는 로마 교황의 권위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1517년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역사를 지나면서 퇴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은 서유럽 근대 지성사에서 대격변의 시기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상징하는 ‘지리상의 대발견’은 서유럽의 소피아가 대서양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옮겨가는 신호탄이었다. 이 대이동의 한가운데 바로 ‘성경권위’에 대한 놀라운 지식혁명의 거대한 물줄기가 동방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과 쌍벽을 이루며 황제 중심의 그리스 정교의 본산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천 년 역사의 종말을 고한다. 비잔틴제국의 몰락은 로마 제국주의 전체의 종말을 고하는 사건이기도 했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더 심각한 면은 그리스 정교의 지도력이 사라졌다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총대주교를 임면(任免)하던 황제권의 소멸이 무엇보다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틈새를 각 지역의 집권자들이 틈을 노리고 있었다. 동로마제국 멸망 당시 모스크바 공국은 그 제국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쩌면 망했으면 하는 제국이 망한 셈이었다. 이렇게 1453년 이후는 그리스 정교회(동방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바뀐다. 이 무렵 서유럽에서는 성경권위 회복 운동인 ‘종교개혁’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스 정교는 철저한 보수성을 특징으로 한다. 이 말은 콘스탄티노플의 전통을 철저하게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변화와 개혁을 원하지 않는다. 서방의 로마 가톨릭보다 더 강력한 수구성을 띤다. 그래서 건물이나 건물 내부의 치장들은 비잔틴제국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지금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남아있는 종교 건축물은 동일한 건축 양식과 거의 유사한 내부 치장으로 되어 있다. 인간의 전적 타락을 믿지 않으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그들에게 천재성이란 전통수호능력과 겉으로 드러나는 도덕적 행위가 모든 종교 활동의 평가 척도가 된다. 한마디로 비잔틴제국의 붕괴 후 동쪽에 잔존했던 모스크바 중심의 동방 정교는 ‘성경권위’의 전통과는 반대의 길을 갔던 야벳 문화의 동쪽 경계선이었다. 
모스크바의 최고 통치자인 대공(大公, grand duke)은 처음에는 여러 대공 중의 한 명이었지만, 후에 세력을 얻은 후 오직 모스크바 공국의 통치자에게만 ‘대공’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서구에서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1547년부터는 모스크바 대공을 황제 칭호인 ‘카이저’ 혹은 ‘임페라토르’를 뜻하는 러시아어 ‘차르(Tzar)’로 칭하게 했다. 당시 무슬림이나 몽골 제국의 위협 속에서 이러한 ‘차르’의 등장을 종교인들과 민중들도 좋아했던 이유가 있다. 바로 사라진 비잔틴제국과 같은 통치력의 구심점과 같은 강력한 국가가 심리적 이유에서라도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급부상이 ‘제3의 로마’ 제국의 등장 배경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명칭만 부풀렸지 잔존하는 유럽 세력의 국소화 내지 지역화에 불과했다고 본다. 난무하는 중세 질서의 잔재에 불과했다. 그것도 그럴만한 것이 서유럽은 대학의 건립이 지식을 이끌었던 반면에 동유럽은 이러한 준비가 거의 되어 있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의 학자들이 남아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들의 상당수는 이미 유수한 대학들이 있던 이탈리아반도와 다른 서방의 대학으로 건너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스크바 동방 정교회에서 늘어난 것은 대학이 아니라 종교 건축물이었다. 16세기 모스크바 크레믈린에 지은 ‘성모영면 대성당’이 대표적인 그 증거물이다. 일명 ‘양파형 돔’으로 불리는 모스크바의 종교건축물의 확장은 국가의 규모야 어떻든 동방 정교회의 구심점이 다시 견고해지는 것처럼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제3의 로마’라는 칭호는 차르의 제국이 아니라 정교회에 부여한 이름이 된다.
동과 서 두 로마는 망했으며 이제 세 번째 로마가 건립되었다는 말이다. 차르의 통치 영역이 아닌 동방 정교회가 지배하는 곳이 제3의 로마의 진정한 소재지다. 그리고 이 모스크바 공국의 수사들은 대공들과 타협 하에 러시아 경작지 4분지 1을 차지한다. 부패하여 몰락했던 중세 로마 가톨릭의 재현이다. 부패한 종교 권력의 길을 다시 걸어간 셈이다.

<160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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