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6-12 21:4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매사에 자세히 묻는 것이 예의다


논어 「팔일」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태묘에 입궐하고는 매사에 물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추(땅) 사람의 자식(공자)가 예를 안다고 했는가? 태묘에 들어와서는 매사에 묻기만 하는데’라고 하였다.
공자가 (이 말을) 듣고는 ‘이(이렇게 묻는)것이 예다’라고 하였다.

태묘는 노나라 주공묘 곧 주공의 사당이다(大廟 魯周公廟).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추 땅 출신이었다. 추는 노나라의 한 읍인데 공자의 아버지가 일찍이 이 읍의 대부가 되어 봉직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공자 역시 주공의 묘에서 제사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공자는 어려서부터 예를 아는 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런데 공자가 주공의 묘에 들어와서는 일을 할 때마다 매번 물어보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공자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를 우습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도대체 누가 공자가 예를 아는 사람이라고 여겨서 태묘에 들어오게 했는지 조롱하고 있다. 그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늘 물어보는 공자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예는 공경하는 것이 전부다(禮者 敬而已矣). 비록 사람이 이미 아는 것이라 하더라도 공손하게 물어보는 것은 지극히 신중으로 기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지 조롱이 될 수 없다. 공경함이란 이렇게 묻는 것보다 더 큰 일이 없다.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공자의 이러한 행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공자가 이런 사태에 대해 스스로 설명을 하였다. “射不主皮 爲力不同科 古之道也, 사부주피 위력부동과 고지도야.”(활쏘기를 할 때 가죽을 뚫는 것을 주로 하지 않는 것은 (활을 쏘는 사람의) 힘이 같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이 도이다.)
이 말은 군자들이 활쏘기를 할 때 과녁을 맞히기만 하면 되지 그 과녁을 얼마나 꿰뚫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사람의 힘은 각자에 따라 강약이 있다. 그런데도 일괄해서 과녁을 꿰뚫을 힘을 일괄적으로 요구한다면 문제가 된다.

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의 형식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예를 행할 때에 공경의 마음이 있느냐의 여부다. 공자는 형식의 얽매임이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인은 결국 사람이 사람으로 지녀야 하는 인정(人情)과 다름이 없다. 이는 동시에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의 도가 ‘一以貫之’(일이관지)라고 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공자는 늘 겸허히 묻는 것을 자신의 인의 도로 삼고 있는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 공자의 사상을 통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는 무엇인가. 참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모습은 하나님을 아는 마음이고 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고 매사에 하나님의 마음을 묻는 그 자세이다.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고 매사에 온 마음을 다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 슬플 때는 자신의 슬픔의 마음을 다했는지 기쁠 때는 자신의 기쁨의 마음을 다했는지를 묻는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할 수만 있다면 매사에 하나님께 묻자. 선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하나님에게 물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물어보기로 하자. 이적의 행사나 많은 십일조와 헌금 누구보다 특출한 신앙실천의 강한 힘을 내세우려 하기보다는 겸허히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들이 되자. 교회 안에서 기도를 통해 차근차근 하나님께 물어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행해야 하는 선한 일을 이루어가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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