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10-07 22:1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관중과 예


子曰 管仲之器 小哉.
자왈 관중지기 소재.

或曰 管仲儉乎? 曰管氏有三歸 官事不攝 焉得儉,
혹왈 관중검호 왈관씨유삼귀 관사불섭 언득검

然則管仲知禮乎 曰邦君樹塞門 管氏亦樹塞門 邦君爲兩君之好 有反坫 管氏亦有反坫
연즉관중지례호 왈방군수색문 관씨역수색문 방군위양군지호 유반점 관씨역유반점

管氏而知禮 孰不知禮?
관씨이지례 숙부지례?
『논어』 「팔일」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관중의 국량(헤아림의 정도)이 작도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공자에게) 물었다. ‘관중은 검소한 사람입니까?’
공자가 답했다. ‘관씨가 삼귀(三歸)를 가지고 있고 업무를 통합하여 보지 않았으니 어찌 검소하다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계속해서) 물었다. ‘그렇다면 관중은 예를 아는 사람입니까?’
공자가 대답하였다. ‘나라의 왕이어야 문을 수색(병풍)으로 가릴 수 있는데 관중 역시 (왕이 아닌 데도 왕처럼) 수색문을 가지고 있다. 왕은 양국의 우호(국교)를 위해 반점(술잔을 되돌려 놓는 자리)을 가질 수 있는데 관중이 (왕처럼) 반점을 가지고 있다. 관중이 예를 안다고 하면 누가 예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

관중(管仲, 출생 미상~BC 645)은 춘추시대 제나라의 재상이다. 그의 이름은 ‘이오’(夷吾)다. 그는 유학자이자 정치가이기도 하지만 그와 포숙아(鮑叔牙, ?~?) 사이에 맺어진 우정이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될 정도로 깊은 우정을 나누기도 한 사람이었다.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제나라 희공의 아들인 규(糾)와 소백(小白)을 제자로 두고 있었다. 희공이 죽고 장남인 제아가 왕위에 올랐지만 포악함으로 인해 사촌 동생인 공손무지(公孫無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하지만 공손무지 역시 죽임을 당하고 그 후에 규와 소백의 왕위 다툼이 일어났다. 이 다툼에서 소백이 규를 몰아내고 제나라의 왕이 되었다. 더욱이 후에 환공이 된 소백은 관중이 자신을 죽이려고 활을 쏜 적도 있었기에 그를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포숙아가 관중을 재상으로 삼으라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관중은 환공의 재상이 될 수 있었다.
관중의 국량이 작다는 것은 그가 성현의 큰 배움의 길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器小 言其不知聖賢大學之道). ‘혹왈’은 누군가가 ‘국량이 작다’는 말을 검소함을 뜻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말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국량이 작다’는 것은 결코 검소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삼귀’는 물건을 얹어두는 대(臺)다. ‘관사불섭’은 한 관리가 업무를 겹쳐서 담당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 당시 제후들은 경제적으로 여력이 없어서 나라에 필요한 대로 관리들을 등용하여 요소요소에 배치할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관리 한 사람이 서너 가지 업무를 동시에 수행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관중은 몇 가지 업무를 한 사람이 동시에 하도록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검소하지 않은 이유다.
오히려 관중은 자기 분수를 넘어서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수(樹)’는 병풍이다. ‘색(塞)’은 가리는 가리개다. 제후가 문에 병풍을 쳐서 안과 밖을 가린다. 관중은 제후처럼 수색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반점은 두 제후(왕)가 만나서 우호를 맺기 위해 술잔을 함께 기울인 후 그 술잔을 놓아두는 대이다. 그것은 왕이 타국의 제후와 우호 관계를 위해 서로 술잔을 기울인 후에 잔을 놓아두는 대였다. 그런데도 관중이 이러한 대를 개인적으로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관중은 자신을 제나라의 환공과 같은 반열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란 형식보다는 어짊을 근간으로 한다. 예는 인자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다. 예는 사람으로서 사람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관중은 정치적으로는 잘했을지 몰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람다움을 느끼게 하는 면에서는 부족하였다. 그는 자신다움을 넘어서 있었다. 관중은 검소하지 않았으며 예를 알지 못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겸허해야 한다. 자신의 위치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 봉사를 잘하고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사람임을 잊지 않아야 하고, 사람이기에 사람다워야 한다.
이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를 위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서로가 서로를 아파해주고 상처를 싸매주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처지에서 공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로를 인정하는 겸허함을 가지고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신만의 믿음을 확고히 하되 검소하게 표현해야 한다. 소박하고 단순하게 신앙을 실천해야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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