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9-03-30 08:3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아침에 도를 들으면……


子曰 人之過也 各於其黨 觀過 斯知仁矣.
자왈 인지과야 각어기당  관과 사지인의.
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자왈 조문도 석사가의.
子曰 士志於道而耻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
자왈 사지어도이치악의악식자  미족여의야.
『논어』 4장 「이인」의 계속이다.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사람의 과실은 각각 그(녀)의 사람됨을 따르는 것이니 그 사람의 과실을 보면 그 사람의 인(사랑)을 알 수 있다.”
공자가 말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공자가 말했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었음에도 나쁜 옷과 나쁜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함께 도를 논의하기에 부족하다.”

군자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 후하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용서해 주다가 그 훈계해야 할 시점을 놓치는 실수를 하기가 쉽다.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최소한으로 박하게 대한다.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 후덕하지 못하고 늘 박하게 하다가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이렇게 그 사람의 과실을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군자가 아침에 도를 들을 수 있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는 말은 누구나 반드시 도를 알아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사람이 알고서 믿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중대한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건대 진실로 얻은 것이 없다면 어찌 저녁에 죽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모든 사람은 죽기 전에 기필코 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도를 들은 자는 군자요 성인이다. 도를 들은 사람은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성취를 이룬 것이다. 도를 들음은 죽음을 맞이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에 아침에 도를 듣고 저녁에 죽을 수 있는 것은 진실로 일생에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도를 기필코 알아야 하는 자가 도를 얻고자 뜻을 두었음에도 자신 또는 다른 사람이 허름한 옷을 입고 허름한 음식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도에 대하여 의논할 자격이 없다. 도를 안다고 하는 자가 자신의 대화 상대를 어떤 옷을 입었느냐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 결정한다면 그의 도는 입고 먹는 데 있을 뿐이다. 도는 이런 것들과는 상관이 없다. 도란 그것을 비록 오늘 아침에 깨닫고서 그날 저녁에 죽어도 조금도 후회함이나 모자람이 없는 그런 성질의 것이다.
냉정히 따지면 본문의 ‘과’(過)는 과실이라기보다는 지나침이다. 군자가 누군가에게 인정을 베풀 때 그것이 늘 지나쳐서 오히려 사람에게 해가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소인은 누군가를 도울 때 딱 그 사람에게 맞을 만큼만 인정을 베풀려고 한다. 소인들의 베푸는 것은 대체로 야박하다. 소인은 늘 이렇게 야박한 면에서 지나쳐서 다른 사람에게 타격을 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러한 한계를 모두 넘어선다. 사랑을 베푸는 데 있어서 지나침은 없다.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결코 모자람도 잘못됨도 없다. 그 사랑의 양(量)은 모든 한계를 넘어선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오른편의 강도는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불과 몇 시간 후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낙원에 갔다. 아마도 그 강도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자신의 전 일생을 가차 없이 잊어버리고 지금 알게 된 그리스도의 도를 아는 즐거움과 희망으로 자신의 죽음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은 흉악한 죄, 가난과 멸시의 환경, 온갖 장애 등을 지닌 자일지라도 그(녀)가 그리스도의 도를 찾고자 하는 자라면 언제 어디서든 그리스도의 도에 대하여 함께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도를 따르고 그 도에 의해 죽고 살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 실천하고 그분의 도를 따라 살고 죽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도만을 최고로 여겨 인생의 어떠한 환경이나 처지를 넘어서서 고고한 인생을 즐기도록 하자. 급박하고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현실이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의 도를 듣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자. 고난과 역경은 참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의 도를 더욱 확실히 하는 매개체요, 죽음은 그리스도의 도를 온전히 완전히 실천하며 살아가는 하늘로 가는 첩경이다. 그러니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초기 니체의 부활관 : ‘자연적 몸’에서 ‘천상적 몸’으로
말씀의 운동력에 의한 취리히 종교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