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9-04-17 19:3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군자의 생활태도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자왈 군자지어천하야 무적야 무막야 의지여비.

子曰 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惠
자왈 군자회덕 소인회토 군자회형 소인회혜.

子曰 放於利而行 多怨
자왈 방어리이행 다원.

『논어』 4장 「이인」
공자가 말했다. “군자가 천하(세상)에 대해서 반드시 주장하는 것도 없고 안 된다는 것도 없다. (다만) 의가 (그와) 함께 따를 뿐이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덕을 품고(생각하고) 소인은 땅(이익)을 품고, 군자는 형벌 받을 것을 품으나 소인은 은혜(빠져나가기)를 품는다.”
공자가 말했다. “이익을 좇아 행하면 원망(하는 사람)이 많게 된다.”

‘무적(無適)’은 사람이 어떤 일을 옳다고 전적으로 주장하는 것을 말한다. ‘무막(無莫)’은 어떤 일을 부정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군자는 단정적으로 이러저러하다고 긍정하거나 단적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군자는 의를 따르고자 할 뿐이다. ‘비(比)’는 ‘따른다(從)’의 의미다. 군자는 ‘된다 안 된다’를 단정적으로 예단하거나 고집하지 않으며 의를 따라 살아간다.
군자의 평소 생활자세는 늘 덕을 실천하려는 데 있다. 그래서 군자는 덕을 세우는 일이라면 자신의 행위가 손해를 입게 되더라도 그 손해를 기꺼이 감수한다. 하지만 소인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상황을 중심으로 행동해 간다. 대체로 소인은 돈이 되느냐 안 되느냐 등에 민감하다. 한편 군자는 덕의 실현을 중시하기에 자신의 행동에 문제가 있게 되는 상황에서는 언제든지 자신의 행동을 책임지고자 한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경우라면 그 행위에 대해 형벌로써 받아들이려 한다(懷刑). 하지만 소인은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하기에 이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변명해대거나 할 수만 있으면 용서되기를 바란다. 그 순간을 피하고 자신에게 이익은 계속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회혜’ 즉 은혜받기를 구하는 행위이다. 하지만 이익만을 좇아서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이들의 비난과 원망이 따를 뿐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은 그 자신이 설정해 놓은 한두 가지 이상의 생활규칙을 가지고 있다. 이 생활규칙을 따라서 생활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몫이다. 자신이 세워놓은 생활규칙이 완벽에 가까우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완벽하지 않으면 그 생활규칙을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늘 나타날 수밖에 없다. 공자는 군자라면 자신의 생활규칙을 기계적으로 정하는 대신에 그 일이 의리에 맞는지를 살펴서 살아가기를 주장한다.
퇴계 선생의 경우가 그 좋은 예라 하겠다. 어느 날 한 백정이 퇴계 선생을 찾아와서는 “오늘 저녁이 부모님 제사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소를 잡아서 피를 보았는데 부모님 제사를 모셔도 괜찮겠는지요?”라고 물었다. 퇴계 선생은 제사를 앞두고 피를 보게 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이 통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백정에게 제사를 지내도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얼마 있다가 한 양반이 퇴계 선생을 찾아와서는 “오늘 저녁이 부모님 제삿날인데 자신이 실수로 벌레를 밟아 죽여서 피를 보았습니다. 그러니 제사를 모시지 말아야겠지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퇴계 선생은 그 양반에게 피를 봤으니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이 두 상황을 모두 지켜보았던 하인이 퇴계 선생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두 사람 모두 피를 보았는데 백정에게는 제사를 지내라 하고 양반에게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그러자 퇴계 선생은 그 하인에게 백정은 비록 피는 보았지만 부모님을 제사하려는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제사를 지내라 한 것이고 양반은 부모님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려는 분명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억지가 아니라 의리에 맞추어서 행하게 하는 것이 퇴계 선생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 역시 평소의 삶 속에서 자신의 생활태도를 결정하는 말씀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요구된다. 그리스도인의 경우 삶의 규칙과 실천은 인간적인 판단 기준에 의해서 움직여지기보다는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냐의 여부에 달려 있어야 한다. 회사나 학교 등에서의 생활태도, 교회 안에서의 생활태도, 십일조나 기도의 신앙생활태도, 대인관계나 봉사 등을 통해 생활양식 등등 일체의 생활 속에서 그 활동의 기준이 인간적 유익함이나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따라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목회자의 설교활동 역시 이러한 하나님의 의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대한의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한두 가지라도 자신의 생활규칙을 마련해 두자. 늘 이 생활규칙을 중심으로 우리 각자의 삶을 실천해 나가자. 우리의 삶의 실천들이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이루어내는 것이 되도록 하자.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경말씀 위에 생활의 규칙을 세워가고 하나님의 의를 따르고 드러내는 생활규칙을 실천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마틴 부처와 토마스 크랜머 그리고 존 칼빈
초기 니체의 부활관 : ‘자연적 몸’에서 ‘천상적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