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0-02-07 19:2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개신교 내의 갈등과 30년 전쟁: 여호와의 역사섭리의 주권성


28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29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30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31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32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33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왕하 17:28〜33).

앞의 본문은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제국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앗수르 왕 살만에셀은 사마리아가 수도였던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제국의 원주민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이주해 온 이방인들은 사마리아에 거주하게 되는데 이들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았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사자(獅子)를 보내어 몇 사람을 죽게 한다.(왕하 17:25) 이때 사마리아에서 잡혀 온 제사장 한 명이 여호와 경외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결과 사마리아에 이주해 온 이방인들은 여호와도 경외하고 자기들의 신들도 섬기게 된다. 바벨론, 굿, 하맛, 아와, 스발와임의 온갖 잡신들과 여호와 하나님이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 된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북이스라엘 멸망 후 열 지파 반이 살았던 이스라엘 전역은 종교다원주의식의 혼합주의 종교가 발생한 것이다. 앗수르제국에 의해 이방인들에게도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님이 소개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건이다. 하지만, ‘여호와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율법의 계명으로 보면 이 상황은 축복은 아니다. 그런데 앗수르제국에게 소개된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후 앗수르제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대로 바벨론제국에 의해 망한다.(사 36:〜37:7) 이는 제국이 한순간 수립될 뿐만 아니라 붕괴하는 근본 원인이 바로 성경에 계시된 ‘여호와’라는 신의 존재와 그의 사역에 달려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은 인간의 추측으로 함부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 섭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한다. 그 고민을 우리는 유럽의 종교개혁 당시의 역사적 사건과 잠시 연관 짓고자 한다.
우리는 지금 1517년 중세 천 년의 암흑기를 지나 성경진리의 광명이 먼저 비춰진 유럽 기독교 역사를 개관하고 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진리를 통해 확증하시는 역사적 섭리는 참으로 그분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이 주권적인 역사섭리를 종교개혁 당시에 일어난 전쟁들과 관련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 내용은 칼빈주의 개혁파 교회가 루터파와 가톨릭 그리고 영국 국교회에 의해 거듭된 탄압을 받게 되었던 사건이다. 1555년 로마 가톨릭에 속한 신성로마제국과 루터교 사이의 전쟁을 멈춘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the Peace of Augsburg)’이 체결된다. 루터교를 제압할 수 없었던 찰스 5세의 어쩔 수 없는 승인이었던 이 평화협정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개혁파 진영은 로마 가톨릭 세력과 루터파의 공동의 적이 되어버린다. 16세기 말 루터파와 개혁파 진영은 성찬식이나 성상(聖像) 철폐 문제에서 심각한 대립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평화협정이 체결되더라도 루터파는 개혁파 진영과 화합하기는커녕 더 대립각을 세운다. 그리고 루터파는 점점 과거 로마 가톨릭의 예배 형식으로 후퇴하고 만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퇴보를 칼빈주의 개혁파 진영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으며 그럴수록 루터파와 더 갈등이 격화되었다. 두 진영 간 전쟁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종교개혁 진영 간의 대립과 갈등이라는 이 상황은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섭리를 깊이 고민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리고 ‘30년 전쟁(The Thirty Years’ War, 1618〜1648)’이다. 30여 개 세력들이 참전한 전쟁으로 사망자 800만 명이라는 인류 전쟁사에서 가장 잔혹한 전쟁 중 하나가 바로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 간의 이 전쟁이다. ‘베스트팔리아 조약’으로 전쟁이 종식될 때까지 정말로 목숨을 건 로마 가톨릭의 신성로마제국 세력과 개혁주의 진영의 전쟁이었다. 현재 체코와 헝가리에 있던 개혁주의 제후들은 교황으로부터 권력의 독립을 위해 신앙의 자유를 갈구하는 개신교도들을 동원해 로마 가톨릭 세력 합스부르크 왕가(현재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때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개혁주의 진영을 후원하여 가톨릭과 맞서 싸우기도 한다. 이에 합스부르크 왕가는 체코의 보헤미안들(이들의 신앙은 루터파도 아니며 개혁주의 진영은 반대했다. ‘후스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단지 로마 가톨릭의 전통을 자신들이 자기들의 법에 따라 자유롭게 지키겠다고 하는 자들이었다.)을 점령하고 유럽에서 그 세력들을 완전히 추방해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진영에서는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프랑스와 루터파를 후원하는 스웨덴이 전쟁에 가세하는가 하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부터 네덜란드까지 전 유럽이 참전하는 유럽의 대전쟁으로 확산된다. 이 참혹한 전쟁은 현재 유럽의 지리적 경계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30년 전쟁을 보면서 유럽인들은 스스로 종교의 자유를 위해 싸우기도 하지만 더 큰 의문에 휩싸였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보다는 그가 과연 살아계신가를 더욱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상황 하나는 잉글랜드 국교회인 ‘고교회(High Church)’의 구성과 구원론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에 기초를 두는 ‘아르미니우스파(Arminians)’의 부상(浮上)이다. 그리고 이 연합 세력들과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내전이다. 고교회론자들은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교처럼 인간의 구원과 직접 관련된 ‘성례전’ 의식의 가치를 강조한다. 아르미니우스파는 구원의 조건은 인간의 선행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 두 종교집단은 예정론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스코틀랜드 개혁파 진영의 공동의 적이 된다. 아르미니우스파와 잉글랜드 국교회는 연합하여 개혁주의 진영을 ‘청교도(Puritan)’라고 규정하면서, 잉글랜드 국교회에 동조하지 않을 때 모두 청교도의 음모에 가담한 자로 낙인을 찍어 탄압했다. 이 와중에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왕당파와 내전을 치르고 처음에는 청교도의 승리로 끝나면서 잉글랜드 국교회 추종자 찰스 1세는 청교도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목이 잘린다. 하지만 다시 망명에서 돌아온 그의 아들 잉글랜드 국교회 수호자 찰스 2세는 아버지의 처형에 가담한 판사 13명을 처형하면서 무서운 보복정치를 실행한다. 왕당파와 맞서는 의회파의 중요 구성원이었던 청교도들은 이렇게 전쟁의 한 가운데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가 하면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역사 섭리는 무섭고도 참담한 역사적 사건을 포함하고 있다. 역사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게 정리할 명제가 아니다. 유럽 근대의 소용돌이 역사 속에서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이름은 전파되었다. 결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고 절규하는 존재부터, 결코 신의 존재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극과 극의 상황 속에서 여호와의 이름은 전파되었다. 유럽의 이러한 절규의 와중에 여호와의 이름은 유럽을 떠나 북미(北美) 대륙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88호에서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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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수 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