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0-08-18 10:2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청렴한 사람과 어진 사람의 다른 점


崔子弑齊君 陳文子 有馬十乘 棄而違之, 至於他邦 則曰猶吾大夫崔子也 違之,
최자시제군 진문자 유마십승  기이위지  지어타방 즉왈유오대부최자야 위지

之一邦 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 違之 何如.
지일방 즉우왈유  오대부최자야 위지 하여.

子曰淸矣 曰仁矣乎 曰未知 焉得仁.
자왈청의 왈인의호 왈미지  언득인.
『논어』 「공야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이렇다.
“최자가 제나라의 군주를 시해하자 진문자는 말 10승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버리고 떠나 다른 나라(지방)로 갔다. (그곳에서) 말하기를 ‘이 사람도 우리나라 최자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고 그곳을 떠나고, 다른 곳으로 가서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최자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하고 떠나갔습니다. 진문자는 어떤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공자는 ‘청렴한(깨끗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자장이) 말하기를 ‘어진 것(사람)입니까?’라고 하였다. 공자는 이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최자를) 어찌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최자는 제나라의 대부로서 이름은 자(杍)다. 제나라 군주는 장공(莊公, ?~기원전 548)이다. 최자가 하극상의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진문자 역시 제나라 대부였는데 10승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마차 1대에 네 마리의 말이 끌어야 했기에 그는 40필의 말을 소유했던 셈이다. 그가 이러한 부와 지위를 이용해서 내란을 일으킨 최자와 적당하게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는 데도 이를 포기하고 난을 피하였다. 그가 다른 나라로 가서도 그곳의 대부나 권력자가 반란을 일으키면 그 반란자 역시 자신의 나라의 최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또다시 피난길을 떠났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불의한 사람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청렴함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였다.
자장은 이러한 진문자의 피난의 삶을 먼저 공자에게 소개하고 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공자는 지체 없이 진문자를 청렴한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자장의 생각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자장은 이 정도의 인물이면 ‘어진 사람’(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공자는 자신 있게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진문자를 ‘어찌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그가 어진 사람이 될 수는 없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공자의 ‘인’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는 공자 자신도 ‘인’이 무엇인지 정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논어 전체를 통해서 보면 ‘인’의 얼개는 근본적으로는 하늘의 법을 실현해 내는 일체의 언행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실천도 억지로 애써서 하기보다는 자연(법칙)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실제 생활과 관련하여 보면 인은 개인적으로 효제의 인륜을 실천하는 것이자 그 일체의 과정을 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본성적으로 따를 수 있는 포괄적 이치(천리)로 적용될 수 있는 이치 내지 도덕법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최자의 피난은 그가 자신의 욕심을 충족하려 하지 않는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어지러운 세상을 구하고 잘못된 질서조차 바로잡으려고 하는 자기희생의 자세는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현실을 회피하기만 하는 것은 공자의 열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공자는 최자를 청렴하다는 수준으로만 인정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리스도인 역시 청렴함의 수준에서만 신앙실천을 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에게 청렴함의 의미는 자신의 양심이나 사회적 규범을 잘 지키는 수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신앙의 규칙이나 적당한 범위 안에서의 도덕적 실천 정도일 수도 있다. 청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현실의 괴로움을 더 영광된 삶을 위해 참아내고, 양보하고 자기 욕망과 욕심을 줄여가는 수준의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이 수준의 생활양식을 넘어서야 한다. 양심이나 규범을 준수하되 그 상위의 즐거움의 영역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즉 청렴한 수준의 신앙실천을 억지가 아니라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실현되고 모든 이들에게 누려지는 것을 진실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끝없는 즐거움의 생활, 영생의 꿈의 실천을 즐기는 생활, 끝없이 도전하는 그 자체를 즐기는 생활, 그래서 즐거움과 꿈이 가득한 생활이 이어져야 한다.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단순히 현실을 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는 현실의 괴로움을 내세의 영생을 보고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남이 알지 못하는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며 영원한 소망이 있기에 유유자적하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되어 가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고대 그리스 국가법의 허구적 이상: ‘모든 소유를 공동으로 하라
스물 여덟. 유럽 종교개혁의 한계선 : 근대 초의 폴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