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0-09-02 20:3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공자의 배움의 한 모습


季文子三思而後行 子聞之曰再斯可矣.
계문자삼사이후행  자문지왈재사가의.

子曰寧武子 邦有道則知 邦無道則愚 其知可及 其愚不可及也.
자왈영무자  방유도즉지 방무도즉우 기지가급 기우불가급야.
“계문자는 (무슨 일을 할 때) 세 번 생각해 보고 난 후에 행동하였다. 공자가 (그 말을) 듣고 ‘두 번 생각하고 하면 괜찮다’고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영무자는 나라에 도가 있을(행해질) 때는 지혜롭게 행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어리석은 자가 된다. 그의 지혜롭게 행함은 따라 해 볼 수 있겠는데 그의 어리석은 자가 됨은 따라 하기가 어렵다.”

논어 공야장의 계속이다.
계문자( ? ~ 568)는 노나라의 대부로 이름은 계손행보(季孫行父)였다. 장문중의 뒤를 이은 실권자로서 노나라 삼환 중의 하나인 계손가문을 이끈 가주(家主)이었지만 청빈하게 살았다. 그가 무슨 일을 하든지 세 번을 생각했다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공자는 계문자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두 번이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공자가 계문자를 이렇게 평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제나라의 선공(宣公, ? ~ 591)이 서자로서 적자인 자약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는데 계문자는 그를 토벌하는 대신에 사신으로 가서 그에게 아부한 것이다. 군자라면 당연히 궁리하되 과단성이 있는 의리의 행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계문자는 생각은 많이 하였으나 의리에 맞는 결단의 실천을 해 내지 못한 것이다. 의리에 맞는 결단성 있는 실천은 두 번만 생각해도 괜찮다는 것이 공자의 입장이었다.
영무자(寧武子, ? )는 위나라의 문공(文公)과 성공(成公) 두 왕 밑에서 대부(재상)의 직무를 감당하였다. 공자가 태어나기 100여 년 전의 시대다. 문공의 통치 때는 태평하였다. 영무자는 지혜롭게 활동하며 문공의 통치를 보좌하였다. 성공은 기원전 632년에 진나라와 초나라가 전쟁하는 과정에서 국외로 쫓겨났다 돌아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영무자가 재상으로서 역할을 잘하여 성공이 돌아와서 위나라를 통치하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게 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이때에는 당연히 재상에서 물러나서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영무자는 이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정말로 어리석다고 할 만큼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백성을 다스려서 성왕이 복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계문자의 사례를 거론한 제자는 자장으로 보인다. 이전부터 자장이 영운자문, 최자 등의 일로 공자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자장은 계문자가 세 번을 생각하는 자세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계문자가 생각은 하되 비겁한 결과나 사사로운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몰랐던 것 같다. 누구든지 세 번을 생각하는 자세는 나무랄 수 없다. 다만 그 생각의 결과가 의리에 맞는 과단의 방향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두 번만 생각해도 괜찮다.
영무자의 경우는 공자가 배우고 싶어 한 삶의 자세였다. 공자 역시 천하를 평화롭게 하려는 의지를 품고 있었기에, 그러나 현실적으로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고 있었기에 영무자의 이 어리석음이 그에게조차 따르고 싶은 삶의 모범이 되었던 것이다.

대한의 그리스도인들이여!! 믿음에 대한 생각을 다양하게 많이 하는 것은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그 결론이 자신에게 유리하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데로 실행되어서는 안 된다. 우직하게 진리를 지키고자 현실에서 굳건한 믿음으로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하는 신앙인의 삶을 자신의 생활모범으로 삼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창궐하며 우리 사회의 미래가 예측되지 않는 이런 상황에서 믿음으로 많이 생각하되 과단성 있는 믿음의 행동으로 이웃에게 용기를 주고 이웃을 화목하게 할 수 있게 하자. 그리스도인으로서 코로나19로 고통을 당한 이웃과 함께하며 평화로운 나라가 이룩되도록 참 믿음의 모범을 서로 실천하며 닮아가자.
고난의 종 칼빈_06
필자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안에 있는 「칼빈박물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1시간의 해설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제가 40년 동안 칼빈과 칼빈주의 사상의 자료를 모아서 칼빈 박물관을 만든 것은 칼빈의 위대성을 예찬하고 칼빈을 높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가장 병약하고 연약한 한 사람 칼빈을 하나님께서 그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교회를 교회 되게, 말씀을 말씀 되게, 은혜를 은혜 되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라고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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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국가법의 허구적 이상: ‘모든 소유를 공동으로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