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1-07-21 20:5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서른여섯.19세기 영국 기독교의 변질: 가톨릭으로 회귀하는 ‘옥스퍼드운동’


19세기 초 영국 개신교는 다른 유럽보다 더 심하게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 말은 영국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또한 교회 출석자들의 숫자도 급감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사회주의, 진화론 등 하나님을 부정하는 인본주의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뿌리마저 흔드는 상황이었다. 사회적 상황도 불안정했다. 영국은 당시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으며 프랑스대혁명의 여파가 영국에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짖게 드리워졌다. 의회가 기금을 풀어 불안한 사회를 진정시키고자 도시 교회들에게 재정적으로 후원하는 정책을 늘리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과 신앙과 관련해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종교개혁 이전 중세 로마 가톨릭과 같은 체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난다. 로마 교황청이 아닌 국가가 종교를 승인하고 관리하는 잉글랜드국교회 체제가 바탕에서부터 흔들리고 종교지도자들은 사분오열하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와중에 의회는 가톨릭에 대한 모든 종교적 제한을 철폐해 버렸다. 그리고 북쪽 스코틀랜드는 장로교 사상을 중심으로 영국 국교인 잉글랜드교회 체제로부터 완전 분리와 독립을 도모하고 있었다. 웨일즈도 잉글랜드국교회에 등을 돌리고 감리교 회중정치 방식으로 돌아섰다.

이러한 영국 교회들의 분열이 가속화하고 있을 무렵 잉글랜드국교회의 근본적 갱신을 주장하는 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을 촉발한 인물은 고교회주의 성공회 성직자였던 존 키블(John Kible)과 옥스퍼드대학교회 주임사제였던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908-1890)이었다. 이 운동은 근본부터 반종교개혁 운동이었으며 사도전승과 교회의 전통 그리고 가톨릭 방식의 예배 의식(儀式)과 종교 의례(儀禮)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반종교개혁 운동은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소책자(tracts)를 통해 전개했기 때문에 ‘옥스퍼드운동’ 내지 ‘소책자운동(Tractarianism)’이라고 불린다. 영국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체제였으므로 종교운동이었지만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사회적으로 미치는 파장도 적지 않았다. 교회가 국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다.

이러한 운동 과정에서 영국국교(잉글랜드국교회)의 성공회 많은 신부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국가의 교회 간섭에 대항해 교회 독립성을 주장하며 성공회의 바른길은 오직 서방 가톨릭을 따르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근본 물음을 제기했으며 그 대답을 (자신들이 규정하는) 초대교회와 교부들이 추구했던 감독제 방식의 교회 체제를 부활시키고자 했다. 운동을 주도한 뉴먼은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영국 천주교회의 주교가 되기도 했다. 성공회에 남은 지도자들도 자신들을 ‘성공회-가톨릭주의’(Anglo-Catholicism)라고 칭했다. 이들의 관심은 “국가로부터 얽매이지 않는 사도교회(Church of the Apostles)의 권위 있는 감독직(episcopate)을 지속”시키는 것이었다. 종교를 빙자한 정치적 운동일 수밖에 없는 영국의 교회 분열 운동인 옥스퍼드운동은 성경의 본래 진리로 거의 돌아올 수 없는 퇴락의 길로 향한 것이다. 존 헨리 뉴먼은 이 운동을 전개하면서 루터교와 칼빈주의 심지어 잉글랜드국교회까지 이단으로 규정했다. 이들이 강조했던 신앙의 핵심은 의식과 형식을 강조하는 성례전 준수와 신부가 중심이 되는 감독제 정치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사항이다. 왜냐하면 성례전을 집례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감독에게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성례전과 감독제는 이후 영국의 제국주의 팽창과 미국 패권주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신흥 종파들과 그들 소속 교회들을 지배하는 토대가 되어 버렸다.(179) 이렇게 19세기 영국의 기독교에는 성경권위가 거의 사라지고 종교개혁의 빛은 거의 꺼져가고 있었다.

중세 문화에 대한 낭만적 동경심을 가지고 있던 영국 사람들도 나라를 시끄럽게 만드는 여러 종파들의 발생보다 국가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잉글랜드국교회를 만들어 중세 가톨릭의 예식으로 돌아가는 것에 매우 호의적이었다. 로마 가톨릭의 미사 방식과는 다르지만 로마 가톨릭과 같은 자신들만의 장엄한 예배 방식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 와중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대다수 교회들이 잉글랜드국교회를 탈퇴하여 장로교 중심의 ‘스코틀랜드자유교회(Free Church of Scotland)’를 설립하였다. 19세기 런던을 중심으로 영국 교회의 분열이 가속화하는 와중에 스코틀랜드에서 성경권위를 주장하는 장로교 전통이 뿌리를 내렸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분열을 단지 인간의 시각에서 좋지 않다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마태복음 13장과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는 진리의 말씀은 철저하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은혜로 관리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참고로 한국에 들어온 성공회 즉 ‘대한성공회’는 바로 옥스퍼드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또 다른 부류는 성경권위를 고수하는 복음주의 계열의 신학자와 목사들이었다.)

하나님 말씀 성경의 권위를 주창하며 일어난 종교개혁이 영국에도 상륙했지만 성경권위를 더욱 분명하게 확정하는 은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결과는 다시 인간의 전통이 지배하는 가톨릭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원한 절대진리 성경의 권위는 인간의 제도나 사상에 의해 혼탁해질 수 없다. 인간이 긍정하면 진리가 되고 부정하면 허구가 되는 그런 대상이 결코 아니다. 성경을 펼치는 순간부터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가 나타난다. 깨닫게 할 자는 진리임을 알게 하여 영생으로 인도하며 그렇지 않은 자는 성경진리를 부정하게 하는 심판의 역사로 드러난다. 오직 보혜사 성령께서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절대진리로 확증한다.

<212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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