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2월 01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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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공유 작성일 : 21-09-29 13:33  글자크기 크게글자크기 작게 기사 출력하기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반기독교적 유물론의 원조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는 모든 현상을 한 가지 이론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들은 모든 현상을 동일한 원리들로 학적으로 엄밀하게 설명했다.

기원전 5세기경 원자론을 정립한 데모크리토스의 스승으로 알려진 자가 레우키포스(Leucippus)이다. 그는 당시 서양 철학의 발원지라는 밀레투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레우키포스를 원자론 주창자로 보았다. 당시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지중해 지역에서 레우키포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필적할 만한 중요한 저술가로도 평가받았다.(408) 그는 여타 고대 자연철학자들처럼 물질을 만물의 근본이며 시작이라고 보았다. 특히 그는 모든 사물의 동질성을 주장하면서 만물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무한대의 작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 이 원자들은 끊임없는 운동 즉 충돌과 재결합을 반복하면서 이 세상의 다양한 혼합물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레우키포스의 유물론 사상을 더욱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데모크리토스다.

데모크리토스(Demokritos, 주전 460년경-370년경)는 당대 모든 학문 분야에 걸쳐 원자론이 토대가 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트라키아의 아브데라에서 부유한 시민으로 살면서, 동방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장수를 누렸다. 클레멘스에 의하면 데모크리토스는 자신의 지적 편력의 방대함과 자기 우월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풍광과 지세를 보았고 수많은 사람들의 말을 들었으며, 기하학적인 증명에서는 나를 능가할 자가 하나도 없다. 이집트의 이른바 ‘끈을 묶는 자들’(기하학자들)도 나를 따르지 못한다.”(406) 그는 지식의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면서 73권의 책을 썼다. 특히 윤리학, 물리학, 수학, 음악, 기술 분야와 관련해서 플라톤의 저작 규모에 필적할 만큼 기록했다.(408) 하지만 오늘날 남은 것은 윤리학 관련 단편 수백 편뿐이다.

데모크리토스 사상의 출발점은 ‘운동의 실재성’이다. 인간의 모든 사유란 바로 물리적 운동의 결과다. 그는 물질의 운동과 인간의 사유를 이렇게 연관 짓는다. “운동이 있다. 그것은 내가 사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유는 실재성을 가진다.”(409) 사유의 실재성은 운동이라는 활동이 모든 사유를 매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은 언제나 빈 공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운동은 ‘비어있음’이라는 비존재 상황과 운동하고 있는 존재가 동시에 발생하는 모순을 전제한다. 분할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데모크리토스는 “존재자란 분할이 불가능한 통일성”(410)이라고 하였다. 분할 불가능한 통일성의 조건은 어떤 형태의 존재라도 모두 연관되어 있어야 하며 그 성질이 동질성을 지녀야 한다. 즉 “오직 같은 것만이 같은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412)는 뜻이다. 가령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대립과 갈등과 투쟁을 반복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동질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러한 동질적 성향들이 구체적인 형태와 배열을 통해 다양한 운동 상황으로 드러난다. 데모크리토스는 헤라클레이토스처럼 “운동에 대한 절대적 믿음”(412)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은 만물을 지배하는 원리인 운동력의 증거다. 물질의 운동력이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며 인간의 영혼과 정신은 모두 오감(五感)에 의한 종합 작용의 결과다. 이러한 유물론자들에게는 “지각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은 동일”(418)하다. 자신이 감각 기관으로 경험한 것이 모든 정신세계의 바탕을 이룬다. 물질과 분리된 독립된 객관적 실체란 존재할 수 없으며 단지 원자들의 생멸(生滅)의 반복이 있을 뿐이다. 원자 발생 자체가 애초부터 원인이 없고 목적도 없는 것이므로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운동의 궁극적 목표도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은 처음부터 매우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위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는 인간의 감각 경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자기중심적 판단에 매몰된 경험을 ‘객관적’ 사실로 삼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기기만이며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조작극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러한 유물론에 대해 비유를 통해 비판한다. “말을 탄 채 물에서 헤엄치면서 다리로는 말을 끌어올리고 자신은 앞쪽으로 드리워진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리는”(419-420) 참담한 신세와 같다. 처음부터 착각으로 시작하는 이 유물론은 객관적 진리와는 거리가 멀며 단지 가설(假說)의 순환만 반복할 뿐이다.

유물론의 이러한 근본 한계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물질 혹은 물리적 인자(因子)에 대한 절대적 확신은 서양 지성사를 지배하는 주요한 철학적 원리를 확정하도록 하는 결정적 배경이 된다. 유물론은 ‘아토마(atoma)’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들’의 존재와 이 존재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하는 무한 공간이라는 비존재도 함께 주장한다. 궁극적 물질과 무한 운동이라는 자기모순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그리고 데모크리토스는 운동의 정점에는 생명체의 ‘영혼’이 운동한다고 보고 있다. “혼은 가장 잘 움직이는 요소, 정교하고 매끄러우며 둥근 원자들로 (불로) 구성되어 있”(416)다. 이러한 운동 원리에 따라 데모크리토스는 “영혼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며, 몸은 영혼의 그릇, 집”(417)이라고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가능한 것에 대해 데모크리토스는 철저히 유물론을 전제로 운동을 설명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이와 같이 세상의 변화와 운동을 가능하게 힘 즉 ‘물질의 운동력’이 자연계 내에 존재하며 그 운동력이 인간의 몸과 영혼을 모두 지배한다고 보았다.

지금부터 2400여 년 전 말라기 선지자가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메시아 언약을 기록할 당시 지중해에는 영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존재를 결코 알 수 없는 유물론을 확정 짓고 있었다. 이는 향후 유럽의 지성자가 유물론의 지배를 받는 사상이 되고 나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물질적인 차원으로 왜곡하는 토대가 되며, 영원한 존재 여호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근대의 과학혁명은 더더욱 유물론을 가속화했다. 모든 것은 과학의 대상이 되었으며 기독교의 하나님도 실험실의 관찰 논리가 지배하게 되었다.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시대, 창조주의 영역까지 아니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의 비밀까지 최첨단 과학 기술 문명은 밝혀낼 수 있다고 허언(虛言)을 진언(眞言)처럼 말한다. 이러한 사상은 이미 2천 4백여 년 전에 지중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약속대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는 그러한 피조물 중심의 우상론에 대해 단죄했으나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심판할 때까지 창조주를 부정하는 유물론에 토대를 둔 사상(가령 진화론)은 더욱 확산할 것이다. 현대에는 특히 과학 기술 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인해 유물론의 반기독교적 저항은 더욱더 보편화할 것이다.   

첨단 과학이 장악하여 지배하는 물질의 세계가 향후 어떻게 조작되고 변형될지 상상을 불허한다. 디지털 변환의 시대에서는 물질과 비물질의 경계는 사라진다. 정신과 물질의 구분도 없다. 신의 존재와 신의 부재(不在)도 조작된다. 필요에 따라 신을 만들기도 하고 신을 죽이기도 한다. 무엇이 객관적 정보인지 그 진실을 알기란 불가능한 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조작 가능한 시대에 변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와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를 내면에 담고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유물론의 허구와 조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한한 은총이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자리 잡길 간구한다.

15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16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 그 나머지도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18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사 44:15-18)

<215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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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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