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2-02-15 10:3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법률 소견:법정 소송보다 중재의 묘를 살려라!


[입법과 관련해서는 과거의 역사를 고찰하고 어떤 종류의 헌법이 유익한지에 대해 정통한 견해를 가지는 것이 유익하다. 그러나 다른 기존의 종류들과 아울러 특정 민족들에게 어떻게 특정 종류의 헌법들이 바로 부합하는 것도 알아야 한다.] (……) 정치적 조언을 위해서는 역사에 관한 저술과 거기에 기록된 사실들에도 정통해야 한다.

바젤 대학 고전문헌학 교수 시절 30세 무렵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I: 수사학 제3권’ 강좌를 실시했다. 그 강의에서 니체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주전 384-322)의 원전을 번역해서 사용했다. 앞의 인용한 부분은 그 원전 번역의 일부다. 니체가 번역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따르면, 수사학은 “모든 사물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가능한 한 신빙성 있는 것이 되는 모든 수단을 알아보는 능력”(464)이다. 인간이 어떤 사물과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을 사용할 때 타인에게 설득력을 얻고 나아가 신뢰를 줄 수 있는 언어 사용의 기술과 방법이 수사학이다. 이 수사학은 현대적 의미로는 (웅변술이 아니라) 논리학이다. 마치 삼단논법처럼 전제와 결론을 오류 없이 구성하는 추론 기술 곧 논증 전략이 바로 수사학이다. 참인 명제를 근거와 주장이 되도록 논리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은 연역법도 있고 귀납법도 있다. 참인 대전제로부터 참인 결론을 유도하는 논증 방법이 연역법이라면, 다양한 개별적인 참인 명제로부터 공통점을 찾아내는 추론 방법이 귀납법이다. 가장 흔하게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는 방법은 어떤 사실을 왜곡 없이 예로 제시하는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이러한 논증의 규칙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국가를 운용하는 입법 활동의 기초를 마련하도록 한다. 강하게 말하면 논증 구성의 능력 없이 국가의 법을 수립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런데 논증(論證, argument) 기술은 우선 참인 명제를 정확하게 만드는 것과 직접 관련된다. 참인 명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령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책이다’는 명제는 참이다. 그런데 이 명제가 참인 진리 주장이 되기 위해서는 전제 구성 즉 다른 명제를 사용해서 근거를 구성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가 헌법은 해당 국가 운용에 가장 적절한 참인 명제가 모여 있어야 하며 또한 명제의 구성은 오류 없는 논증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 가령 헌법 전문이 논리적으로 오류가 있거나 명제의 진리성이 명확하지 않다면, 이는 국가의 정체성에 심각한 타격을 안겨준다고 할 수 있다.
니체가 인용한 부분을 보면 올바른 입법은 반드시 그 나라의 과거 역사를 반영해야 한다. 국민과 국가를 위한 헌법의 유익성 여부는 역사적 정통성 위에 서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역사적 정통성을 국가의 헌법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때 그 법 조항이 아무리 명문(名文)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의 정당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정 민족들의 특정 종류의 헌법들도 잘 살펴볼 것을 권한다. 그래서 국가 운영과 관련된 정치적 조언을 명확히 하고 이를 국가 통치를 위한 입법을 위해 “역사에 관한 저술과 거기에 기록된 사실들에도 정통해야”만 한다.
가령 “(자유롭게 선거에 참여하여 권리를 행사하는-필자 주) 민주제의 목표는 자유이며, (재산 규모로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필자 주) 과두제의 목표는 부, (법률적 지식을 교육을 통해 전수하는-필자 주) 귀족제의 목표는 교육과 관습, (무한 권력을 가진 군주제로서-필자 주) 참주제의 목표는 안보”(503)라고 할 때, 논증 구조로서 성문화된 헌법은 각각의 정치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얼마나 해당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데 정교하고도 치밀한 참인 명제를 확정하고 오류 없는 논증 구성을 하고 있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국가의 적법한 운영과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폭넓게 반영한 참인 명제를 무수히 나열했다고 바른 헌법이 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국가에 맞는 법률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치밀하게 고려하는 것이다. 국가 체계가 곧 헌법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헌법은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정치꾼들의 조작에 의해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런데 니체가 소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 따르면 아무리 훌륭한 법률이 있다고 하더라도 법규정에 호소하지 않는 더 바람직한 방법이 있다. 즉 법정 소송으로 가서 판사가 사건을 마무리해 주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소개한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3’은 이렇게 마치는데 그 결론이 이렇게 나온다. “법정 소송으로 가기보다는 중재 심판의 절차를 밟는 것. 왜냐하면 중재자는 공정성의 관점을 가지고 있고 판관은 법의 관점을 가지고 있어, 공정성이 더 큰 힘을 얻도록 하기 위한 목적에서 중재자가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538) 니체가 소개한 내용은 법정 소송보다 중재 심판의 절차가 정착하는 시민들의 정치 문화를 정착시킬 것을 권한다. 정치적으로 무슨 일만 있으면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저급하고 비열한 정치 후진국을 면하지 못하는 우리나라 정치 현실을 보면 ‘중재의 묘’는 머나먼 이상처럼 보인다.
어쩌면 현대 국가에서는 이 중재의 묘수는 점점 찾아볼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국가적 이해관계는 거의 포탄 없는 전쟁 상황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국내 정치 상황이든 국가 간 외교 상황이든 타협과 중재의 묘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타협과 중재를 밥 먹듯이 말로 반복하지만 실상은 민족주의 이념을 자극하며 국가의 대치 상황은 ‘문화 전쟁’의 격화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국내외 정치 상황에서 니체가 소개한 법률보다 고차원적인 ‘중재의 묘’를 기독교인으로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에는 가능한 일인가? 이러한 중재의 묘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는가? 우리에게 멀지 않는 곳 성경 진리에 기록된 중재 곧 하나님과 세상을 화해시킨 중재(중보)의 위대한 사건이 있다. 바로 이 땅에 오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재의 유일한 정답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니체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정치의 이상이라고 던진 ‘법정 소송’보다 앞서는 ‘중재 심판의 절차’를 유일한 중재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존해서 다시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221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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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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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감은 올곧아야 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