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교회 생활 및 운영의 문제점과 대안(2)
구약의 율법이 성도가 지켜야할 규범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루실 언약적 복음이라고 제대로 배우게 되면, 성도들은 그 복음의 은혜 앞에 무한히 감격하고 감사하는 인생이 될 것이다. 즉 계명의 율법 앞에 저주 받아 마땅한 죄인을 위해 예수가 대신 십자가위에 죽으시고 살아나심을 분명하게 깨닫는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존재가 혁명적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가르치는 대로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새로운 인생이 되는 것이다.(갈 2:20) 인생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변하게 되면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언제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일중심의 시각이 사라진다. 즉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즉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하는 놀라운 새로운 인간관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존재로서의 만남이다. 이런 만남 속에서라야 성도의 관계가 편안해지고 세상에서의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거리낌 없이 나누며 위로 받을 수 있는 안온한 여유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예수님 앞에 찾아온 무리들이 예수님에게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요 6: 28-29)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의외였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이것은 일 중심, 외형중심, 율법 중심의 외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의외의 대답이었다. 묻는 무리 들은 무엇인가를 외적으로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로 생각하지만 하늘의 생명의 양식으로 이 땅에 찾아오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를 믿는 내면적인 일”을 진정한 하나님의 일로 본 것이다. 요한복음 6장에서 계속 이어지는 대화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부터 오신 생명의 양식이요, 자신의 피가 참된 음료이심을 증거하신다.
교회는 이런 예수의 복음을 깊이 깨닫고 누리는 곳이다. 예수의 생명을 먹으며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율법의 규범 혹은 자신과 세상이 그릇 설정해놓은 규범아래 아래 억압되었던 영혼들이 자유와 쉼을 얻는 곳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 이것을 우리는 깨닫고 누리는 삶이 바로 교회 생활의 근간이요, 핵심이다. 예수로 자신의 전 존재가 변화되어 가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교회의 강단은 율법, 혹은 도덕적인 규범을 전달하는 곳이 결코 아니다. 강단은 이 우주를 만드시고 우주의 주관자이실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자리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죄악을 청산해 주셨다. 그 안에 죽고 살아난 진정한 중생의 경험을 한 성도는 율법이라는 규범의 종노릇하는 수동적인 인생이 아니다.
우리 안에 대신 사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새 존재의 삶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성도를 섬기며 살아가는 교회 생활은 율법을 지키려는 삶이 결코 아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 이런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이 내면에서 흘러나오게 될 것이며 사랑의 동기로 짐을 지려고 할 것이다. 교회를 섬기는 원동력이 병든 옛 자아의 자기 의(自己 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된 새 자아의 감사와 기쁨에서 나오기에 기꺼이 섬기고자 할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자발적 성격을 띠게 된다.
예수를 믿고도 자신 안에 옛 사람의 소욕으로 몸부림 쳤던 바울(롬 7장)은 로마서 8장에서 복음의 위대성을 노래 부른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켰다고 노래 부르고 있다. 바울은 이 세상 무엇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줄에서 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복음의 확신과 기쁨은 율법아래 두려워하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종노릇하는 새로운 삶이 나오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갈라디아서는 진리의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되면 율법아래 있지 않는다고 증거하고 있다(갈 5:18). 즉 성령은 심비에 새신 복음을 통해 자유케 하며 사랑의 섬김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모름지기 교회는 복음의 해방을 누리는 곳이며, 그 복음이 만들어 내는 감격이 진정한 헌신과 섬김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복음이 증거되는 교회라면 무거운 의무감, 그리고 정죄와 죄책감, 억지와 외식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쉼과 평강, 그리고 진정한 섬김과 헌신이 나올 것이다. 이를 복음의 능력을 통해 성령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아멘!
2) 기복주의적 신앙생활과 그 대안
이제 우리가 검토하고자 하는 신앙생활상의 문제점은 기복주의적인 신앙생활이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무속적 기복주의’이며 둘째는 ‘세련된 행복주의’이다. 전자는 인간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되 투박하고 맹목적이다. 이 세상에서 자식들 건강하고, 우환 없이 잘살고 싶어하는 인간 보편의 욕망을 기초로 한다. 누가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고 싶어하지 않는 자연인이 있던가! 그래서 무속적인 기복주의, 즉 신을 매개하는 무당적인 존재에 의해 세상적인 복을 누리고 싶은 심성과 그 행태는 첨단 현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없어지지 않는다.
후자 즉 ‘세련된 행복주의’는 본질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무속적 기복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 보다 훨씬 세련된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고 현대 감각의 스타일로 변장하여 나타난다. 그래서 그 정체와 문제점을 간파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적인 성취와 성공을 노래한다. 그래서 현대인의 구미에 잘 들어 맞는다. 이른바 번영신학(theology of prosperity)을 내세우는 교회 성장론에서 말하는 류가 그런 것이다. 그것은 로버트 슐러식의 “적극적 사고 방식”, 혹은 최근에 조엘 오스틴식의 “긍정의 힘”으로 이어지고 있다.
먼저 전자의 문제점을 검토해 보자. 한국교회의 외형적인 부흥은 실제 ‘무속적 기복주의’와 결탁하여 가능했다. 기독교가 전래되어 오기 전 한국인의 사고 방식과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무속적 기복주의였다. 이는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천국 복음이 없었던 세상에서 그것은 필연적이다. 이 세상은 고난과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위험과 불확실이 도처에 있기 마련이다. 이런 척박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우환을 피하고 안전한 세속적인 복을 희구하는 것은 너무도 절실하고 자연스럽다.
문제는 그런 인간의 연약한 심리를 이용하고 거짓 예언으로 밥 먹고 살아가는 무당적인 존재를 근본에서 혁파하지 못한 기독교 복음의 변질에 있다. 오히려 목사가 신을 매개하는 무당적인 지위에 서서 성도들에게 자신도 믿지 않는 세상적인 복을 천배 만배 빌어주는 행태에 있다.
무당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는 특별한 신적인 카리스마를 가진다. 그는 영험하며 보통 사람이 접하지 못하는 신적인 영역을 넘나들면서 신을 매개한다. 무당은 일반 사람의 고통과 불행의 문제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역이용하여 신의 축복을 빌미로 밥 벌어 먹고 산다. 이때 신은 두말할 나위없이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가 아니다. 그 신은 복을 원하는 자의 복채에 의해 달래지는 잡신이다.
너무 마음이 고통스럽고 그래서 절실한 사람들은 그 무당의 굿판과 축복의 메시지에 의해 무거운 짐을 한시름 놓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무당을 혐오하고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런 무속적인 사고방식과 구조가 기독교 안에 기독교의 이름으로 변장하여 파고 들어 온 것이다.
한국적인 기독교의 부흥은 이런 구조와 결탁하여 이루어 졌고, 그 양태는 아직도 성도들의 심성 속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목사가 축복 기도하는 것이 마치 영험이 있는 듯이 생각하며, 하나님의 복이 목사를 통해 전달되는 듯이 느낀다. 목사는 가까이 하기에는 두려운 존재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목사를 마음속에서 존경하지 않는다. 이는 무당을 대하는 것과 유사하다. 무당과 복을 원하는 사람사이에는 인격적인 교감과 교류가 없다. 문제해결을 위해 서로를 이용하면 끝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부, 아니 어쩌면 상당부분이 이런 관계로 변질되어 있거나 그렇게 타성화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참으로 기독교의 불행이다. 기독교란 그렇게 저속하거나 값싼 복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우주와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 우리 인생의 참된 복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위대하신 사역을 근간으로 한다.
하나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무당적인 특별한 인간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아니던가! 하나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무궁한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은 죄로 말미암는 인간의 참상을 잘 아시고 그 불행 안으로 뛰어 들어 그 죄값을 대신 받으시고 부활하신 분이시다.
복음은 세상의 가치관과 에누리 없이 충돌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평을 주러 온것이 아니요 도리어 분쟁케 하려고(눅 12:51) 혹은 검을 주려고(마 10:34) 이 세상에 오셨다. 물론 이 말은 하늘의 진정한 평화를 주시려고 오신 예수님의 사역을 부정하는 차원이 아니다. 이는 세상의 가치관과 충돌하여 그를 분쇄하시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워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사역의 측면을 설명한다.
진정한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내면속에 자리 잡고 있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붕괴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대안의 제시가 없이 되는 억지스런 일이 결코 아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와 고통의 뿌리인 죄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이자 대안이다.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고 은혜 안에 부르시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소개서인 복음은 인생의 진정한 대안이다. 따라서 하나님 없이 잡신의 존재를 이용하여 연약한 인간의 심성을 파고 들어오는 무속의 영향력은 복음의 빛 앞에 서면 원천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영원한 구속을 약속하는 진리의 복음은 이 세상적인 가치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영원한 복을 약속하고 그것을 천국에서 실현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위에서도 그 맛을 미리 보고 살아 갈수 있다. 성경이 증거 하는 이런 복을 바르게 증거 할때 라야 무속적 기복주의는 기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늘의 복음으로 충만했던 바울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위해 힘있게 살아갔다. 그에게는 세상의 불행이나 죽음이 그의 근본 가치를 흔들어 놓지 못했다. 이처럼 복음은 위대하다.
목사는 그런 세속적인 복을 빌어주는 무당적인 존재가 아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 목사는 다른 모든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 가기 위해 세워진 여러 직임중의 한 직임을 받은 자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 은사를 부여 받은 소중한 한 지체인 것이다.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는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처럼 서로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참된 인격적인 관계 속에 있다. 이는 무당과 복 받기를 위하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종교적인 거래관계가 될 수 없다. 복음에 기초하는 진정한 인간관계의 회복은 한국교회의 새로운 전진의 뚜렷한 지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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