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0-09-24 23: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경의언어10/여호와라는 신


많은 나라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나 칭호를 바꾸어 왔고 바꾸어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여호와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호와는 언약성취사적 성경신학에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총체적으로 연결하는 성경의 핵심어로 확증되어 있다. 이렇게 중요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여기서는 문제 제기에 의의를 두고 연구하고자 한다. 

1)성경계시의 신(神)

성경에서는 여호와라는 신 이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한다. 이 다른 신은 모두 이방 신이다. 세상의 통용어로 귀신 신(神)이라고 하는 이 글자는 비 올 때의 번개가 치는 모든 상황을 그린 것이다. 이 신자에는 물과 불이 함께 있는 것이다. 이 神을 ‘바른 성경’에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영(靈)으로 많이 바꾸었다. 성경계시의 신은 성경이 계시하는 신이다.

①물불을 내는 신

물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다. 실제 생활에서도 물과 관계된 말을 많이 사용한다. 물불 자체가 힘이 된다고 해서 수력이나 화력으로 표현한다. 물은 먹고 씻는데 사용되며 또한 동식물에 있어서도 필수이다. 물 자체의 힘이 강하다고 여겨 수마(水魔)가 할퀴고 간다라고 한다. 물귀신이나 불귀신으로 사용함은 힘이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러한 물귀신-불귀신 등은 모두 이방 신이다. 이방성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에 함몰됨이다. 시간은 여호와 하나님을 배우고 기억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도구이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예루살렘의 성전도 하나님 여호와를 잊지 않고 경외하는 중요한 장소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하신다.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지배하시며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수면 위에 운행하신다(창1:2). 그 운행하신다는 의미는 시편 19편의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저 끝까지 운행하니”와 같다. 여호와 신은 민족의 신이나 이방 신이 아니다. 그 의미는 창조주로서 모든 만사만물을 운행하시고 심판하신다는 의미다. 이방 신은 물불과 같이 상대적인 것과 함께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신은 물불을 장악하고 다스리는 분이시다. 언약하고 그 언약을 이루는 섭리 과정 속에 물세례와 불세례가 있다. 또 하나님이 여호와이시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물심판과 불심판이 있다. 물불을 내고 다스리는 것이 계시의 한 방법이라면 깨닫게 하는 것은 계시의 목적이다. 

 ②깨닫게 하는 신 

물이나 불 등보다 신이나 성령 등이 성경을 깨닫는 과정에서 훨씬 중요하다. 그것은 신이나 성령 등은 성경계시의 목적 중심으로 관계되는 절대적인 용어이고 물이나 불 등은 성경계시의 방법 중심으로 관계되는 상대적인 용어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인정한다. 이런 차원에서 옛 한 철인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고백한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무엇을 깨닫는가의 내용에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하고 머리를 맑게 하는 것은 바로 신을 깨닫는 일일 것이다. 성경은 그 깨닫는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고 한다. 인간 스스로 그 무엇도 깨달을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처럼 깨닫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성경계시는 하나님을 알려주는 핵심서이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작정하신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을 깨달아 알게 하여 경외하게 하시려고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다. 바로 언약성취 섭리를 통해 성경계시의 신을 깨닫게 하신다.

2)여호와(耶和華)

 여호와는 히브리어 발음으로 ‘예호-아’에 가깝고 중국어 발음으로는 ‘예허후아(Yehehua)’에 가깝다. 이 중국어에 대한 한국어의 발음은 ‘야화화’이다. 세계의 교회가 대부분 이 여호와를 주(主;Lord)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때에 한국과 중국의  구약성경에 히브리어 발음에 가깝게 남아 있는 것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문제는 단순한 발음이나 단어 하나의 뜻풀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구조화되어 있는가와 깊이 관계되어 있다.

①구약만 아닌 신구약의 신
 
여호와라는 말이 구약에만 약 7000회 정도 나온다. 특히 출애굽기부터 느헤미야서까지 많이 나오고 있다. 섭리를 통한 언약의 끝인 에스더서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러한 에스더서에는 여호와가 지니는 의미인 통치언약의 성취섭리가 오히려 집약되어 마무리해주고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 여호와라는 명칭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성취의 의미가 없는가? 라는 것과 통하는 것이다. 시가서의 중요한 부분인 전도서에도 한번도 나오지 않으며 아가에는 단 한 번 나오고 있다(8:6). 이 문제는 언어의 표현과 언어자체의 상대성이라는 한계에 관계된다. 이 세상에서 사용되는 언어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는 것과 그 의미가 통한다. 언약을 이루시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이 여호와는 구약성경에 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서도 구조적으로 동시에 인용되어 증거 되고 있다. 이 문제는 왜 성경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되어 있는가와 밀접하다(이 내용에 관하여, 박용기저, 성경강론13권의 그리스도 성취 시작부분인 6705쪽에서 6708쪽까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②언약하고 성취하는 신

성경은 여호와의 언약과 그리스도 성취로 의미상에서 논리체계화 되어 있다. 여기서의 ‘언약하다와 성취하다’의 의미는 모두 절대용어이다. 물론 창세기의 시작인 ‘태초에’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말인 ‘있을지어다’까지 그 모두를 절대용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에 신구약성경 전체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언어가 아니고 하나님 계시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세계에서 통용되는 의미전달의 수단이기 때문에 상대적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바벨탑 사건으로 언어를 흩으신 것(창11장)에서도 그 해결의 단서를 얻을 수도 있다. 시편19편에서 “언어가 없고 말이 없으며 그들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영원하며 영원한 신이다. 그 영원한 신께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서 성경의 언약(구약)과 성취(신약)라는 논리체계를 사용하신 것이다. 언약하고 성취하는 신은 성경이 계시하는 영원한 신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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