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9-03-08 04:46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예수는 한 인간으로 아버지를 반사하는 거울이다


우리가 칼 바르트의 글을 읽을 때에 확립해야 할 사안은 ‘유일신론’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관이라고 보지 않은 것이다. 삼위일체가 아닌 유일신 개념은 슐라이어마허가 제언한 것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유일신론 종교로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제언했다. 그들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감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기독교의 독특성을 제거하는 기법을 시작했다. 전통적 자유주의는 예수 탐구로 기독교를 학문이나 윤리로 구성했는데, 슐라이어마허에서 시작한 자유주의는 유일신론을 확립하면서 모든 종교에 가능성을 개방했다. 칼 바르트 이후에 신론은 더 개방이 진행되어, 힌두교, 불교, 토속종교까지 확장시켰다. 이러한 신론이 개방신론(open theism)인데, 종교다원주의의 신관이다. 몰트만에 와서는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Panentheism)으로 확정되었다. 신 이해는 유신론, 범신론, 이신론, 만유재신론 그리고 무신론이 있다. 우리는 칼 바르트의 신관을 삼중일신(Gottes Dreieinigkeit)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Gottes Dreieinigkeit’을 ‘삼위일체’라고 번역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며, ‘삼위일체성’이라는 번역은 인정할 수 있다. 우리 번역에 삼위일체로 번역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바르트 번역에서 삼위일체 어휘는 독일어를 확인해 보아야 한다. 이것을 꾸준히 반복하는 것은 이 과정만 확인하면, 바르트에게 삼위일체가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가 없는 신학은 절대로 기독교가 될 수 없다.
바르트는 나사렛 예수가 주(主)라는 것이 신약성경에서 근거해서 자명하지 않다고 제시했다. 바르트에게 “한 주(主)”는 아버지뿐이다. 나사렛 예수는 현실적인 인간이어서 주(kyrios)라는 술어가 붙으면 예수와 전혀 다른 타자이다. 그럼에도 예수에게 주권이 있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주권을 수행하는 신성 본질이다. 바르트는 예수가 주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는 주권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반복해서 예수가 주가 아니라고 제시한다. 예수가 아버지의 반사나 거울(Abglanz und Spiegel)이 되어 사람이 예수를 통해서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구조를 제시했다. 바르트는 예수가 아버지를 볼 수 있는 도구적인 위치로 제언한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는 성경 말씀(요 14:9)을 따르는 표현 같지만, 많은 신학 이해에 혼선을 가져온다. 믿음의 대상에서 예수가 제외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종교로서 기독교가 정통 기독교이다. 정통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창조주로 믿는다(요 1:1-5). 그런데 바르트는 유비로 돌파해서 창조자에서 예수를 제거하고 창조자를 아버지로 제한시켰다. 예수는 본성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에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도 아버지가 창조자라는 것을 제시하는 것으로 주장했다. 예수를 창조자에서 제거했기 때문에, 정통신학의 삼위일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
바르트는 아버지를 한 창조자로 세우는데, 아버지를 현존하는 주(Herrs unseres Dasein)로 제시했다. 성서의 증언으로는 예수, 신의 종 안에서 계시되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현존하고, 그에 관해서 증언하는 것에 의하면 거룩한 신, 한 신, 자유 신(神)이다. 이러한 제시는 위격 개념이 아닌 삼중적 구조를 제언하는 것이다. ‘일신 삼위’ 개념과 ‘일신 삼중’ 개념은 바르트에 의해서 구체화되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바르트는 예수의 십자가, 부활 무엇으로도 신성(神性)을 인정하지 않았다. 성서는 유비를 통해서 아버지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우리가 앞에서 제시했듯이 그 아버지의 존재는 상존(Sosein)이 아닌 현존(Dasein)이다. 바르트는 숨어있는 신, 계시된 신(Deus absconditus et Deus revelatus)을 제시한다.
바르트가 제시한 숨어있는 신은 칸트처럼 인식할 수 없는 물자체(物自體, Ding an sich)가 주는 유익을 인정하고 있다. 현대주의는 인식해야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인식하지 않는 존재에 대해서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다. 그러나 사람은 인지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안정감을 갖기도 하는데, 그러한 현상을 물자체(物自體)의 신비로 연결시킬 수 있다. 칸트의 이론에서 물자체가 주는 유익을 제거하면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차이가 없다. 합리 세계에서는 물자체를 제거한 수준으로 발전하고, 비합리 세계에서는 물자체의 신비를 강조하는 불가지론(agnosticism)이 발전한다. 바르트의 체계는 불가지론인데, 우리 시대는 불가지론의 시대가 되어, 안다고 말하면 교만이고 모른다고 말하면 영성이 좋다고 평가한다. 개혁된 종교에서는 명확한 믿음(explicit faith)을 추구한다. 바르트의 신학 체계가 화려하고 정교하지만 결국 맹목적 믿음(implicit faith)을 구상화시킨 로마 교회 체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로마 교회가 초기에 자기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오해해서 칼 바르트의 신학을 거부했지만, 예수회 소속, 칼 라아너(Karl Rahner, 1904-1984)의 이해로 바르트의 신학을 적극 수용하면서 2차 바티칸 회의(1962-1965)로 로마 교회 신학 체계를 확립했다. 바르트의 “교회 밖에서 가능한 신학”과 로마 교회의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은 동일한 사고 체계이다.
칼 바르트는 정교하고 단단한 사고 체계를 구축한다. 기독교 신학이 성경에서 멀어지면 사변적인 철학 체계가 유입된다.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교회 가르침을 개혁(회복)시켰다. 바르트가 성경을 계시문서처럼 말하지만, 성경무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성경을 강조해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이 말씀이 되는(become) 수준은 너무나 큰 수준이다.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는 성경 이해를 더 명료하게 세우지 못했다. 계몽철학이 지배하는 시대정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중세 시대(신학의 시녀인 철학)보다 더 사변을 신학(철학의 시녀인 신학)에 도입했다. 거기에 중세 후기에 체계화되기 시작한 신비주의까지 도입시켰다. 칸트의 합리주의에 신비주의를 결합시킨 최초의 작품이 칼 바르트의 체계이다. 슐라이어마허는 칸트의 합리주의(이성)에 감정을 결합시켰다.
칼 바르트의 신학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인 표현을 하지 말자고 제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긍정적인 표현도 하지 않아야 한다. 필자는 이해하지 않는 수준은 취하지 않아야 할 수준이라고 제언한다. 그러나 칼 바르트가 성경무오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자기 신관은 삼중일신을 체계화시키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창조자 아버지에서 예수의 신성을 완전히 제거하고, 창조자 아버지로만 창조주로 구상화시켰다. 그렇다면 결코 삼위일체는 불가능하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천하만국의 왕
성경의 중간적인 연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