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9-04-17 19:2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억되어 생각나는 원천


기억력의 중요성을 대개 인정한다. 기억력은 개인의 건전성을 보는 중요한 한 척도이기도 하다. 누구나 무엇을 기억해 내려고 할 때, 끝까지 기억나지 않은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러 측면에서 기억은 참으로 귀하며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시험과 같이 어떤 과제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많은 것을 기억해야 할 경우는 고통스러우며 괴롭다. 이처럼 기억은 긍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때로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무엇을 기억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육과 밀접하다. 구약성경의 신명기에는 민수기에서 세대의 교체를 겪은 이스라엘을 재교육하는 내용이 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여호와께서 하신 일들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강조하고 있다. 시편에는 구약 성도들의 기도가 많은데, 그 기도 중에는 여호와께 그들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는 경우가 꽤 많다. 인간들의 기억은 너무도 불완전하며 짧다. 이런 인간들의 불완전한 기억에 비하여, 여호와의 기억은 영원하며 절대적이다. 여기에 진정한 소망이 존재하는 셈이다.

기억나고 생각나는 원천이나 근본을 제시하고자 함이 이 글의 목적이며 주제이다. 기억과 생각은 너무도 밀접하다. 때로는 둘은 동의어(同義語)가 되기도 한다. 대개 기억이 나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거의 동의어로 여겨서 크게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이 글의 논지가 기억이나 생각에 있어서 인간의 능동이나 피동에 더 중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일반학문에서는 인간들의 기억과 생각 등에 대해서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다. 이러한 문화나 조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고 성경으로의 관심을 불러오고자 함이 위의 목적과 대동소이하다. 기억이나 생각의 원천을 논하고 분석하기 위하여 근본적인 원천에 대부분의 비중을 둔다. 동시에 그 근본적인 원천으로부터 따라오는 지엽적인 원천을 함께 다룰 수밖에 없다. 기억과 생각의 근본적인 원천을 성경에서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 못 박고 있다. 성령께서 모든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인간들의 마음의 생각을 간단히 짚고자 한다.


1) 몸에 거하는 성령

모든 사람에게 각자 몸이 있다. 이 몸의 신비함에 대해서 감탄하고 노래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성경에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와 같은 표현도 있다. 세상에는 사람의 몸처럼 잘 조직된 것도 극히 드물 것이다. 이러한 몸뚱이도 머리나 심장을 중심으로 집약되어 있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수많은 지체가 모여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는데, 정작 몸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몸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다. 성경의 답변은 참으로 간단하며 명료하다. 그것은 “성령의 전(殿)”이다. 몸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성령뿐이다. 성령의 전은 성령께서 거하는 집이다. 이런 맥락에서 몸을 두고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라고 해도 무리 없이 통하게 된다. 성령이 인간의 몸에 거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억하고 생각하게 된다는 이 진리에 누가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기억이 나거나 기억을 함에 있어서 성령을 부정한다면 밑도 끝도 없게 된다. 이쯤에서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막 3:; 눅 12:)는 말씀으로서 인용한다면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될까?


2) 뜻을 깨달은 마음

“마음의 생각”은 가능해도 “생각의 마음”은 불가하다. 생각은 마음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기억나기 때문에 생각하게 되고, 반대로 생각나기 때문에 기억하게 된다는 것은 두 가지 모두 가능하다. 그렇지만 생각은 마음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난다는 것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방법적으로 기억이 나거나 생각이 나는 논리나 원리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성경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 근본적으로 그 뜻을 모르고 기억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인간의 뜻을 구할 수밖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논설위원,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화해자로서 아들 하나님’은 기독교 신학에 없다
“아버지를 목표로 하는 신학”은 부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