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0-08-18 10: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계시의 시간


『교회교의학 I/1』에서 2장 “하나님의 계시”를 진행하면서, 1부분은 삼중일신(Der dreieinige Gott), 『교회교의학 I/2』에서 2장 2부분 “말씀이 육신이 됨(Die Fleischwerdung des Wortes)”이고, 2장 3부분은 성령이 부어짐(Die Ausgießung des Heiligen Geistes)이다.
바르트가 제시한 하나님의 계시는 삼중일신, 말씀의 성육신, 성령이 부어짐의 구도이다. 우리는 Der dreieinige Gott를 ‘삼위일체’로 번역하는 것을 부정하고 있다. 영역(英譯)에서도 Trinity가 아닌 The Triune God으로 구분하여 번역했는데, ‘삼위일체’로 혼용하여 번역되는 것은 부당하다. 삼위일체는 Trinity로 대칭해서만 번역해야 한다. Dreieinigkeit(삼중성)은 삼위(three person)와 같지 않다. 바르트가 그것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부분이 교회교의학 2장 1부(Der dreieinige Gott)이다.
그리고 2장 2부분 “말씀이 육신이 됨”에서는 “§ 13.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를 제시했고, 2장 3부분 “§ 16. 성령의 부어짐”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3장에서 “성서”, 4장에서 “교회의 선포”로 『교회교의학 I/2』을 구성하고 있다.

“§ 13.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에서는 “계시의 객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을 제시했고, “§ 16. 성령의 부어짐”에서는 “계시의 주관적 현실성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바르트는 말씀의 성육신에서는 계시의 시간과 비밀을 제시하면서,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를 해체시킨다. 교회교의학 2장 1부(Der dreieinige Gott, 삼중일신)에서는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삼위일체를 해체시켰다. 그래서 우리는 바르트의 Der dreieinige Gott가 삼위일체로 번역되는 것을 거부한다. 바르트는 § 9에서 “해체될 수 없는 존재양식”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하나님(das Du)과 인간인 나(das Ich) 관계로 신학을 구성시킨다는 발상이다. 특이하게 바르트는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2조(성자 하나님) 조항만을 주해했다. 그것을 필자는 전통적인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를 제거하고 자기 사상으로 재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전통적으로 성자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데(요 1:1), 바르트는 성자 하나님께서 창조주 됨을 거부했다. 이것이 서철원 박사가 박사논문 과정에서 밝힌 내용이고, 바르트의 창조론을 평가할 때에 바르트가 삼위일체를 해체시켰다고 각주로 포함시켰다(The Creation-mediatorship Of Jesus Christ. A Study in the Relation of the Incarnation and the Creation, 1982).

바르트는 2장 2부와 3부를 “계시의 객관”과 “계시의 주관”으로 분화시켰다. 계시의 객관은 신에게 부착시키고, 계시의 주관은 인간에게 부착시켰다. 바르트는 1부에서 신 존재를 계시 안에서 인간에게 인식되는 수준으로 정리했다. 바르트의 신 존재는 “계시 안에 있는 신”이다. 이 계시에 객관과 주관이 있는데, 객관은 신에게, 주관은 인간에게 부착시켰다. 바르트는 “계시 안에 있는 신”을 말하지만, 우리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참고. 프란시스 쉐퍼 저,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 이건 역, 생명의말씀사). 콘스탄티노플 신경(381년)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구도를 밝혔다. 

바르트는 § 14. “계시의 시간”에서 객관과 주관을 연결하는 구도를 제시한다. 바르트의 체계는 너무나 세밀하게 엮어서 운용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세밀한 구도가 아니라, 계시에 의한 단순한 구도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communion)을 명시적이지 않지만, 실제로 있는 구도를 밝힌다. 바르트는 그 구도를 이성으로 명확하게 밝힌 것이 특징이다. 우리는 바르트의 제시가 전통 신학의 제시와 어떻게 견주는가를 비교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바르트의 주장은 너무나 정교하고 세밀하고 합리적이다. 바르트의 글만 읽으면 충분히 설득당할 수 있다. 그러나 바르트는 기독교의 한 사람에 불과하다. 기독교 안에는 그리스도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신자도 있었다. 우리는 기독교 안에 “정통과 이단”이 있다고 제시하고 있다(참고. 고경태 저, 『기독교란 무엇인가』, 우리시대). 기독교는 정교를 분리(종교의 자유)시킨 미국과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이단을 정죄할 능력을 상실했다. 전근대적인 사고가 유지되었던 대한민국에서는 40여 년 전까지는 이단을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통일교 제품 불매 운동을 펼쳐서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가기까지는 했다. 그러나 OEM 방식이라는 경제 체제에서 다시 통일교 제품은 우리 사회에 가득하다. 최근에 형성된 신천지는 통일교를 모방해서 신문사를 만들어 사회 핵심에 진출했다. 대학교만 설립하면 사회의 한 일원으로 자리하게 될 것이다. 유럽은 삼위일체가 아닌 이신론(합리적 신(神))에 근거한 자유주의가 만연할 때, 그 사상으로 사회를 적응시켰다. 이신론 체계가 1, 2차 세계 전쟁으로 인정할 수 없게 되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 적절한 대안을 준 위인이 칼 바르트이다. 칼 바르트는 1차 대전을 승인한 자기 선생들(95인의 독일인 지성인에 참여한)의 행위에 놀라서, 그들과 결별을 선언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2차 대전을 주도한 히틀러에게 동조하지 않았지만, 유명한 학자들은(불트만, 하이데거 등) 히틀러에 동조했다(참고. Victor Farias, Heidegger und der Nationalsozialismus, Frankfurt, 1987; 박찬국 저, 『하이데거와 나치즘』, 문예출판사). 나치즘을 거부한다고 하지만, 나치즘에 동조한 학자들의 사상은 건재했고, 가장 큰 기틀을 유지하고 발전했다. 바르트의 사회주의 사상이나 하이데거의 나치즘이나 하르낙의 합리주의는 모두 일맥상통하는 사상이다. 그것은 정통 신학이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이나 세계에서 정통 신학이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인정하자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리는 바르트의 § 13.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유”, “계시의 객관성의 현실성과 가능성”을 읽은 뒤에 약간의 정리를 하면서, § 14. “계시의 시간” 독서를 진행할 것이다. 계시를 객관과 주관으로 분류한 것은 정통 신학이 취한 것이 아니다. 바르트가 구도한 계시 안에 있는 신, 객관과 주관으로 연합되어 성서와 교회로 구조화시켰다. 정통신학은 계시하시는 하나님, 성경과 교회로 구조화되어 있다. 바르트는 자기 합리성으로 구조화시켰지만, 정통신학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형성된 것을 정리한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유(객관)와 인간의 자유(주관)가 펼쳐지는 공간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순종하는 거룩한 진리 집단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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