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0-10-21 13:4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계시의 시간: 타락과 성취


필자는 “창조-타락-구속”의 시간 이해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창조-타락-심판-구속”의 구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제언했었다. 그런데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도는 바르트의 시간 이해도 이와 유사하다. 창조된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타락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성취(Erfuellte Zeit)하는 구도를 제언하고 있다. 바르트의 시간 이해에 타락이 있지만, 심판, 회개라는 구도는 생략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바르트가 타락, “우리의 시간과 신에 의해서 창조된 시간”을 “제삼의 시간(dritte Zeit sein)”까지 제시했었다(KD I/2., 52, GG., 73, CD., 47).
낮과 밤과 맺은 계약(Bund/covenant, 렘 33:20), 생물들과 맺은 계약(창 9:16)을 제시하는 것은 바르트의 언약 이해의 독특한 견해이다(KD I/2., 52, GG., 73, CD., 47). 바르트의 시간에 타락이 있는 것은 보수적인 견해이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실존으로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간과 타락이 있는 시간이 곧 현재(Gegenwart/present)이다.
현재(現在)는 매우 철학화된 개념이다. 바르트는 어거스틴과 하이데거의 개념을 융합하고 있다.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며, 현재는 없다. 그것은 시간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시간이 생성된다고(entstehen/arise) 제시했다. 생성(生成, Werden, Entstehen)은 헤겔이 사용하는 철학 용어이다. 헤겔은 세계를 생성으로 파악하고, “생성(Entstehen)이자 소멸(Vergehen)”을 제시하였는데, 최정호 목사(플레모스 카흐발트 대표)는 “소실과 전진”의 구도를 제언했다. 헤겔의 변증법적 시간 이해는 생성과 소멸 구도로 인간이 소망하는 이상적인 구도이다. 최정호의 시간 이해는 구속사적 시간 이해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되며 인간이 믿음이 필요한 구도이다. 어거스틴은 시간의 창조성과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으로 제시했다. 하이데거는 시간의 현재성을 강조했다.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는 산물 그리고 칸트는 시간의 이율배반성을 제시했다.
그리고 바르트는 시간과 영원(Zeit und Ewigkeit) 관계를 전개한다. 최정호 목사는 시간과 영원을 “동질동류”라고 평가했다. 최정호는 어거스틴과 바르트는 시간과 영원의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평가했다. 최정호는 아토-초(Atto-second, one quintillionth of a second, -18)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수 있음에도 6일 동안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원과 시간에서 동질동류”라고 평가한 것 같다. 바르트는 영원에 시간을 포함시키며, 시간과 계시를 일치시켰다. 바르트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와 “말씀이 시간이 되었다”를 동일하게 평가했다. 그래서 성육신 이해에서 시간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KD I/2., 55, GG., 77, CD., 52).

"Das Wort ward Fleshch" heißt auch: "Das Wort ward Zeit" Die Wirklichkeit der Offenbarung in Jesus Christus ist auch das, was wir die Lebenzeit eines Meschen mennen(KD I/2., 55, GG., 77, CD., 52).
"The Word became flesh" also mean "the Word became time" The reality of the revelation of Jesus Christ is also what we call the lifetime of a man.

우리는 바르트가 전개하는 신학을 개인 자격으로 소개하는 내용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바르트의 구도(scheme)는 사람의 사고이기 때문에 다양한 요소에서 독단(獨斷)을 하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완전한 체계를 구성시킬 수 없다. 사람이 만든 체계에는 반드시 맹점이 존재한다. 이 부분에서도 바르트의 독단이 나타나는 문장이다. 독단은 증명할 수 없는 요소이다. 반틸 박사는 전제주의(presuppositionalism)라고 바르트 체계에 대립했다. 반틸 박사와 바르트의 전제(presupposition)는 같지 않다. 반틸 박사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에 대치되는 문장이 없지만, 바르트는 “말씀이 시간이 되었다”로 환치(換置)시켰다. 바르트는 계시와 시간을 일치시키는 구도이고, 그 개념이 현실성(Wirklichkeit)이다. 바르트는 시간과 계시를 이중성으로 처리시켰다.

바르트에게 계시는 역사 안에서 발생하며, 계시를 판단하는 규범성을 불가능하다고 제시했다. 그런데도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본디오 빌라도 시절에 있었던 사람을 성육신한 말씀으로 평가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을 특수한 것으로 제시했다(Das ist aber das Besondere der Zeit Jesu Christi).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현실적으로 성취된 시간(gerade darin wirkliche, erfüllte Zeit)으로 규정했다. 바르트는 성취된 시간을 기원 1-30년으로 제시한다(KD I/2., 65, GG., 87, CD., 58). 앞에서 제시한 본디오 빌라도와 예수의 만나는 시간(GG., 78)은 33년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명확한 제시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바르트의 독단의 표현은 “하나님이 스스로 존재한다”라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위한 시간을 가진다”로 환치시켰다(KD I/2., 60, GG., 83, CD., 54-55).
바르트가 제시한 “계시와 역사(Offenbarung und Geschichte/revelation and history)”에서 역사에 대해서 명료한 이해가 쉽지 않다(KD I/2., 61, GG., 84, CD., 56).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 Geschichte이다. 게쉬히테를 역사(歷史)로 단순 번역하면, history(Historie)와 분별하기 어렵게 된다. Historie는 역사(歷史)로 객관적 기술을 목표하며, 단순 지식을 추구한다. Geschichte는 주관적 역사로 동일한 과거 사건을 접하는 개인마다 다르게 인지된다. 게쉬히테는 교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을 추구하는데, 인식은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가치이다. 계시는 역사 안에서 발생된다. 역사와 시간의 동질 개념이지만 일치하지는 않는다.
바르트는 계시 행동(Tat/fact)과 행위(Akt/act)의 주체는 신으로 규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목적으로서의 계기(terminus a quo, 출발점)”와 “수단으로서의 계기(terminus ad quem, 도달점)”로 제시했다(GG., 84). 바르트는 계시가 생성(발생)되는데, 그 원형이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된 시간을 1∼30년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특징 중 하나이다. 예수의 생애를 33년이라고 하는데, 30년으로 한정시킨 것은 3년의 생애에 대해서 암묵적으로 침묵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라이마루스(H. S. Reimarus, 1694∼1768)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객관적 생애를 파악할 수 없다는 원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신약에서 “신앙의 그리스도”가 아닌 “역사적 예수” 탐구가 시작되었다.
바르트의 글을 읽으면서 정리된 필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바르트는 영원 안에 시간이 있는데, 시간에서 의미가 발생(werden)될 때에 영원과 교류하는 구도이다. 시간에서 발생된 게쉬히테는 계시이다(Geschichte ist ein Prädikat der Offenbarung). 그럼에도 계시가 포괄적인 개념이다. 인간은 계시에서 영원에 들어가기(get in) 때문에 영생이고 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신의 자유와 사랑으로 그 상태에 머물 수 있다(stay in).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무한한 자원을 의지하지 않는 인간의 불신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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