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1-07-01 21:3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칼 바르트의 마리아론 (1)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5. 계시의 비밀(Das Geheimnis der Offenbarung) 2. Wahrer Gott und wahrer Mensch 참 사람과 참 사람, 네 번째 주제로 “마리아론”을 제시하였다(GG., 178).

4. 어느 정도까지는 말씀의 성육신론에 대한 바른 이해에 대하여 다음이 또한 시험이 될 것이다: 개신교도 그리고 개신교 신학자로서 우리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지칭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의 소위 마리아론의 부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리스도론적 진리의 적법한 표현으로 긍정하고 좋게 평가한다. 이러한 지칭 안에서 인식으로써 그것이 잘못 사용되는 위험에 대한 경고가 물론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저 인식과 또한 이러한 지칭 자체가 그렇다고 해서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4. Es bedeutet gewissermaßen eine Probe des richtigen Verständnisses der Lehre von der Fleischwerdung des Wortes, daß man auch als evangelischer Christ und Theologe die Bezeichnung der Maria als "Mutter Gottes" nicht etwa ablehnt, sondern trotza ihrer Belastung durch die sog. Mariologie der römisch-katholischen Kirche als legitimen Ausdruck der christologischen Wahrheit bejaht und gutheißt. Die Abwehr des Mißbrauchs, der mit der in dieser Bezeichnung ausgesprochenen Erkenntnis getrieben worden ist, wird nicht fehlen dürfen. Aber jene Erkenntnis und darum doch auch diese Bezeichnung selbst deswegen doch nicht unterdrückt werden. 4. To a certain extent it amounts to a test of the proper understanding of the incarnation of the Word, that as Christians and theologians we do no reject the description of Mary as the "mother of God" but in spite of its being overloaded by the so-called Mariology of the Roman Catholic Church, we affirm and approve of it as a legitimate expression of christological truth. We must not omit to defend it against the misuse made of the knowledge expressed in this description. But the knowledge in qustion and so the description as well must not for that reason be suppressed(KD., 151-152: CD., 138: GG., 178).

우리는 바르트의 상당히 긴 문장을 인용하였다. 먼저 신학에서 “마리아론(Mariology, 혹은 Deipara)”이 있지 않다는 것을 주지시키면서 시작한다. 칼 바르트도 개신교 신학에 마리아론이 있다고 하지는 않았고,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마리아론이 있다고 제시하였다. 바르트가 evangelischer Christ und Theologue(개신교도와 개신교 신학자)와 the Roman Catholic Church(로마 가톨릭교회)로 사용하였는데, 적당한 대조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Reformed Church 혹은 Evangelical Church와 the Roman Catholic Church로 대조시키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루터와 칼빈은 교회(Church)를 The Holy Catholic Church라고 생각하였고, 개혁교회 교회관의 기본도 The Holy Catholic Church이다. 정확한 대조는 The Holy Catholic Church와 the Roman Catholic Church로 이해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을 “지칭(Bezeichnung/description)”하지 않고, 보편 신앙 문장(the Dogma), 진리 문장으로 고백하고 믿는다. 테오토코스(Θεοτόκος, Dei genetrix)는 431년 에베소 공회의와 451년 칼케돈 공회의의 중요 논점이었다.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는 테오토코스를 결정하였지만, 451년 칼케돈 공회의에서는 Dei genetrix(하나님을 낳은 자, Mother of God or God-bearer)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의 어머니”보다 “하나님을 낳은 자” 이해이다. 영어 번역자가 어머니를 소문자(mother)로 번역한 것도 특이하다.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가 정죄되었고, 네스토리안은 이라크와 실크로드 지역에서 교회를 유지하고 있는데,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역사적 이해는 거의 없다고 한다. 451년 칼케돈 이단인 유티케스주의자들은 이집트 콥틱,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등으로 오리엔탈 정교회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는 정통 교리(Dogma, 431년 에베소 공회의, 451년 칼케돈 공회의)를 따라서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자로 고백한다. 교리는 교회의 서고 넘어짐의 조항(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이다. 그런데 바르트가 그 믿음 문장을 “지칭(Bezeichnung/description)”이라고 한 것은 교리에 대한 합당한 자세라고 볼 수 없다. 바르트는 교리를 해체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추정(推定)할 수 있다.
우리는 마리아를 하나님을 낳은 자, 하나님의 어머니로 고백하는 것을 마리아론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인 것은 그리스도 이해 부분이다. 우리 번역(신준호 역)에는 “마리아론”을 로마 가톨릭교회만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바르트의 영역에서는 ‘우리(we)’를 사용하고 있다. 바르트는 마리아론에 대해 인정하는 부분과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복해서 우리에게 “마리아론”은 있지 않다.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로 고백하는 것은 “마리아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에 대한 신비”를 고백하는 문장이다. 손가락(지시, 상징)과 달(목표)에서 손가락만 바라보는 것을 우리는 의사소통에서 심각한 오해를 양산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에베소 신경과 칼케돈 신경에서 등장하는 “테오토코스”와 “하나님을 낳은 자”를 볼 때에 “마리아”에 착념한다면 손가락에 머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징에 머문 이해는 상징에 빠진 몰(沒) 상징이다. 상징은 사라지고 지시체인 목표가 부각되어야 한다.
칼 바르트가 마리아론을 비판하는 것 같지만, 인정하는 것과 부정하는 것이 있는 “시시비비(是是非非)”이다. 우리는 시시비비를 말해야 하지만, 논쟁할 때는 비론(非論)이든지 시론(是論)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논박할 대상에서 시시(是是)를 구하는 것은 좋은 자세가 아니고, 형제에게 비비(非非)를 주장하는 것도 좋은 자세가 아니다. 논쟁할 대상에게 시비(是非)를 구하는 것도 좋은 자세일 것 같지만, 논쟁할 때에는 좋은 자세라고 보기 어렵다.
우리는 바르트가 마리아론에 대해서 어떻게 시비(是非)를 구성하는지 살필 것이다. 결국은 개신교 측의 맹점을 지적하는 것이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우호적인 결과가 된다(GG., 189). 약 10 페이지의 방대한 변증 과정을 통해서 바르트가 무엇을 말하는지 다음 글에서 살필 것이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에서 작은 글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큰 문제인데, 바르트의 깊은 메커니즘은 작은 글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모든 문장을 반복해서 끊임없이 독서해야 한다. 서철원 박사님께서 『교회교의학』을 강독할 때 방대한 바르트의 저술을 읽기 위해서 작은 글자는 넘어가면서 진행하셨다. 그래도 몇백 페이지를 읽지 못하였는데, 서 박사님은 바르트 저술을 우리처럼 많이 읽은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라고 자처하셨다. 바르트 『교회교의학』의 작은 글자에 있는 메커니즘, 특이 마리아론에서는 작은 글자에 바르트가 추구하는 마리아론의 메커니즘을 살필 것이다. 바르트는 정직한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 정체를 결코 숨기지 않는다. 다만 정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게 깊은 곳에 새겨놓았을 뿐이다. 빙산의 일각을 보고 빙산을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빙산은 얼음이지 바위가 아니다.
필자는 현대신학을 강의하면서 현대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통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정확해야 한다고 밝힌다. 그래서 현대신학은 신학 마지막에 위치한다. 정통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없이 현대신학을 접하면 그 급류에서 나올 수 없다. 우리나라와 세계에서 서철원 박사의 『교리사』가 정통 기독교를 가장 잘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서 박사님의 『교리사』 출판기념회에서 서평하는 어떤 박사께서 『교리사』에 성령 이해가 부족하다고 평을 했는데, 참 아쉬운 평가였다. 『교리사』에 성령 이해가 어떻게 빠질 수 있을까? 현대신학의 성령과 『교리사』의 성령은 틀리기 때문에 다르다. 현대신학의 시조가 칼 바르트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칼 바르트의 시류에 있는지, 정통 기독교의 믿음에 있는지 파악하고 결정해야 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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