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22-03-30 10: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성탄절의 기적(5) 동정녀 탄생 : 비밀에서 기적으로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2, § 15. 계시의 비밀(Das Geheimnis der Offenbarung) 2. Wahrer Gott und wahrer Mensch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다. 3. 성탄절의 기적이다. 우리는 § 15. 계시의 비밀(Das Geheimnis der Offenbarung)의 마지막 부분에서, 칼 바르트가 제시하는 성육신은 정통 기독교 성육신 이해와 전혀 다름을 먼저 밝힌다. 그것은 § 15. 3이 “성탄절의 기적”인데, 칼 바르트는 교회에 나타난 성탄절 제시를 “성탄절의 기적”이라고 하고, 그 근본은 “성탄절의 비밀”이라고 구도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탄절의 기적이 실재(fact)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예수 그리스도의 현실성, 사건(event), 계시의 비밀에서 나타난 표현의 한 수단이 기적으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 바르트는 § 15. 계시의 비밀(Das Geheimnis der Offenbarung)에서 칼케돈 신조의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어휘와 사도신조의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natus ex Maria Virgine)”와 “성령으로 잉태하사(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를 기독교와 전혀 다른 자기 사유 체계로 완전히 대체시켰다. 우리는 칼 바르트는 삼위일체(Trinity, trinitatis)를 삼중일신(혹은 삼위일체성, Gottes Dreieinigkeit, The Triune God)으로 대체시켰다고 밝혔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를 자기반성에 의해서 계시에서 출발하여 해체하는데, 정통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에서 이단적 교설의 도전에 의해서 변호적 성격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 믿음 대상으로 합당한 가치를 형성시킨 고백이다. 바르트의 성육신 이해가 정통 기독교와 같다면 삼위일체도 정통 신학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성육신과 삼위일체에서 둘 중 하나가 오류가 있다면, 전체 오류가 될 절대 가치이다. 둘 중 하나는 문제, 하나는 정상이라고 분석되었다면 그 논리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계시 이해와도 연결된다. 바르트가 계시를 수없이 말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계시라고 이해한다면 착각도 너무나 큰 착각이다. 계시 이해가 같다면 삼위일체, 성육신 이해에서 동일한 가치를 갖게 된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정통신학을 거부하고 새롭게 자기 신학(교리, Dogmatics)을 형성시켰고, 그것은 신-정통주의라고 한다. 필자는 박사논문에서 바르트의 신학은 신정통주의가 아니라 반(anti) 정통주의라고 결론했다. 그것은 삼위일체를 거부하고 새로운 체계를 형성시켰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나 세계 교회가 칼 바르트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것은 계시 이해의 함정에 빠져 삼위일체를 해체시켰기 때문이다. 그것의 정확한 증거가 성육신을 하나님의 성육신(동정녀 탄생, 성령으로 잉태됨)이 아닌(기적으로 표현함) 계시의 현실성(계시 사건, 성탄절의 비밀)으로 제시한 것이다.
칼 바르트는 “주님의 탄생은 성행하는 성적인 관계가 없는, 생산하는 남성이 없는 탄생이다”(GG., 251)라고 정확하게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교의학적 의미”라는 것이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I/1. § 1 문장을 돌아보게 한다. 거기에서 바르트는 '재검토'를 시사하였는데, 전통적인 교의학적 진술을 재검토하여 재정립하는 것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바르트의 전제는 신, 신의 자유였다. 그래서 바르트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사역의 동역자가 될 수는 없다”(GG., 251)라고 밝힌다. 신을 높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 진술과 상치된다. 성경에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전 3:9)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동정녀 마리아 탄생과 성령으로 잉태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태가 성령의 사역으로 제시한다(GG., 251). 그것이 기적의 탄생이라고 밝힌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의 탄생”(GG., 252)이라고 제시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적 계시 진술과 교회의 영역 안에서 성령에 관한 표현의 차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령의 작용에 대해서는 인정하면서, 본성에 따른 잉태됨과 동정녀 마리아 탄생을 제시하였다(GG., 252-253). 이러한 표현은 기적인데, 기적은 한 아이의 생성에 관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관계된 것도 아니며, 오히려 신 이해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실체화와 배후의 관계 문제인데, 신화의 표현인 기적의 실체화 배후에 있는 것을 보아야 하며, 기적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체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마술적 기적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시도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관한 말씀을 다른 어떤 자연철학적 사변으로써 혹은 다소간에 참된 말하자면 생물학적 종류의 자연과학적인 인식들로써 도와주려는 시도가 제거된다. 우리가 다음을, 즉 성령으로써 철저하게 동정녀 탄생의 표징의 원인자로서의 하나님 자신이 진술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면, 그 때 우리는 이 표징의 현실성에 대한 고백으로써 미리 앞서 그것을 어떤 자연적 가능성으로 이해하기를 (비록 우리는 예를 들어 자연적인 처녀생식과 같은 사고를 도입함으로써 그렇게 하도록 유혹받더라도) 포기해야 함을 알게 된다.” 바르트의 진술을 보면 신의 자유와 주권을 강조하지만, 동정녀 탄생은 거부하고 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가치 문제가 아니라 현상과 배후의 문제이다. 현상은 여러 표현이 가능하지만 배후는 유일신뿐이라는 것이다.
253쪽부터 성령에 대해서 긴 설명을 한다. 바르트가 주장하는 계시의 현실성 문제이다. 예수가 화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사역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사역, 화해가 일어나게 된 것이 성령이며, 성령의 자유라고 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인간도 성령으로 계시의 수용자가 된다고 밝힌다(GG., 253). 바르트의 계시 이해는 계속적이며 발생적이라고 밝힌 이유이다.
바르트, 자유주의, 현대신학자들의 특이한 질문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면 성령의 아들로 불려야 되지 않느냐는 황당한 도전이다. 그러한 표현이 없기 때문에 “성령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을 뜻하지 않음”(GG., 255)으로 결론하였다.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 사이에 어떤 결혼 같은 것이 발생하였다는 식의 상상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GG., 255). 바르트가 이해한 수준을 최고의 신학자, 석학으로 바라봐야 할지 의문스럽다. 정통 교회의 교부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바르트의 상상은 경악스럽다.
그러면서 바르트는 "동정녀를 잉태시킨 성령"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상당히 자랑스럽게 표현한다(GG., 256). 어거스틴, 다메섹 요한, 튜레틴 등 다양한 정통 신학자와 개혁 신학자를 연결시켜 자기 정당성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에서 어떤 것이 우선하느냐는 단순한 질문인데, 속임으로 유도하는 질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구도를 질문하여 확인시키는 것은 정당한 절차가 아니라 속임 기술을 쓰는 것이다. 그러한 기술을 쓸 때는 오류라고 확신이 들었을 때 확인을 위해서 사용할 수는 있다. 이러한 질문을 할 때에는 상대방이 오류에 있다고 확신할 때 쓰는 우월적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답변하지 않으셨다. 모든 질문에 충실하게 답변하는 것은 지식 문제가 아니라 지혜 문제이다. 때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 나를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질문에 충실하게 답변하면, 나는 함정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한 질문에 답변하지 않아야 한다.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에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 하나님의 화해하는 사랑, 구속하는 지혜를 제시한다. 바르트의 창조, 화해, 구속이라는 신의 삼중성에 있는 부분이다. 창조는 능력, 화해는 사랑, 구속하는 지혜의 이해할 수 없는 행위라고 칭송하는데, 전형적인 바르트의 수사 기술이다. 교회의 믿음 진술이 아니다.
우리가 지적하려는 마지막 문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신 나사렛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에게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이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것이 그 자체로 승인될 것을 요청하는 불가해한 비밀이기 때문에,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던 것이다”(GG., 258)이다. 한 인간 예수에 대한 가치 평가에 의해서 동정녀 탄생, 성령으로 잉태됨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문장이다. 진리는 선후관계가 바뀌어도 문제가 없다. 하나님의 성육신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이다. 삼위일체이시기에 성육신하셨다.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르트는 그 선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즉 전자(동정녀 탄생과 성령으로 잉태됨)로는 합당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 된다. 진리는 부분적 진리도 전체 진리에서 내용이나 권위에 전혀 차이가 없다.
바르트는 “성탄절의 기적과 성탄절의 비밀”로 구도화시켰는데, 비밀은 기적에 근거하지 않으며, 기적은 비밀에 근거한다고 밝히며, “그 비밀이 기적을 통하여 산출된다”(GG., 259)고 선후관계를 정립하면서, 성육신에 대한 논의를 종결하였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주님의교회 / 형람서원)
이메일 : ktyhb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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