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예순넷: 교회 부패와 타락, 펠라기우스 자유의지론의 배경
“내가 목회하는 지역의 부요한 사람들은 그저 쉽게 교회를 택하기만 하면 교회의 회원이 되는가? 그것도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진정한 자각도 없이?” 앞의 인용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原罪)와 은총(恩寵) 이론에 맞섰던 펠라기우스(Pelagius the Briton, 354년경-418년경)의 한탄이 어린 말이다. 영국 브리턴 출신의 수도사이자 신학자인 그는 신앙인들의 금욕적 생활과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 교리를 악용하며 무책임한 행동을 일삼는 자들에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한 도덕적 순결과 실천으로 도덕적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를 품고 태어난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며 자유의지를 통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결국 제국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정죄 받았으며 41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그의 가르침은 공식적으로 단죄 받는다. 그는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태어나며, 도덕적 선택을 통해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인간이 아담의 죄를 물려받지 않으며 스스로 죄책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원죄 교리를 부정했으며 모든 인간이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상태로 태어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기 위해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지만, 이 은총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거나 구원의 필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반박과 교회의 파문(破門)에도 불구하고 중세와 근대 및 현대 신학까지 펠라기우스의 자유의지론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펠라기우스가 볼 때 원죄 교리는 인간들의 수동적 성향을 부추기고 나태하고 게으른 삶의 구실을 만들어 어떠한 선행도 할 수 없게 하는 폐습이다. 관련된 펠라기우스의 주장이다. “우리의 눈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지만, 우리 눈을 선용하거나 악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다…. 우리가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모든 선한 것을 수행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이러한 가능성을 부여하고 또한 돕는 분으로부터 나온다.”(473)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주신 은총과 우리의 능력을 구분한다.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그 도덕적 양심에 바탕을 둔 실천 강조가 그의 목적이다. 이렇게 되면 원죄는 존재할 수 없으며 인간의 선한 본성은 모든 인류의 공통분모가 된다. 그리고 인간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도덕적 양심을 따라 타인에게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것이 종교적 삶의 전부가 된다. 로마 교회의 권력에 밀착해 가난하고 무지한 자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떠벌리는 로마 기독교 상류층과 부유층의 타락 앞에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보다는 인간의 부도덕한 범죄에 압도당한 것으로 보인다.
펠라기우스의 도덕적 자유의지론과 성도의 행위책임론 강조는 그보다 앞서 일어났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죄했던 도나투스파(Donatism) 운동을 연상시킨다. 이 운동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303-311년) 기간 중 성경을 제국에 반납하고 신앙을 포기한 배교자들에게 교회의 성례전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교회의 순결성과 성직자의 청결 회복을 강조한 사건이다. 성직자의 도덕적 결백성과 정결함을 엄격하게 지키며, 배교자들이 포함된 교회는 더 이상 참된 교회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교회의 세속적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신앙 공동체의 독립성 유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들을 반대하고 정죄했지만 역설적으로) 한편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꿈꾸었던 이 지상에 도래하는 ‘신의 도성’을 실현하려고 했던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교회사가 맥클로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를 이렇게 비교한다. 원죄론을 통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험악한 비관론에 비해서 (……) 그[펠라기우스-필자 주]의 가르침은 모든 인간 존재의 어깨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최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해야 하는 끔찍한 책임감을 올려놓은 것”(474)이다.
펠라기우스의 추종 세력들이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번성하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십자군은 종교 권력을 앞세워 그들을 탄압했고 추방했다. 이론 논쟁 중에 물리적 폭력으로 의견이 다른 쪽을 제압하는 것은, 당시 일상화한 방식이라고 하지만, 입을 폭력으로 강제로 봉한다는 것은 해결이 아니라 더 큰 저항의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이 와중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론과 예정론, 은총론과 교회권력론을 더욱 강화했다. 이쯤이 되면 바르고 건전한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권력을 통해 집행되는 강제력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도나투스파와 펠라기우스에 맞서 종교권력으로 대처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방식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은 교회의 교리가 아니라 뛰어난 가톨릭 신학자의 사견일 뿐”(476)이다. 현재까지 동방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과 은총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해 “세상을 부정하는 충동에 사로잡힌 플라톤주의나 스토아주의의 후예”(476)라고 혹평할 때, 이유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신의 초월성, 피안의 세계, 현실을 벗어난 영원한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의 타락과 부패를 더욱 부추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펠라기우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를 앞세우며 플라톤주의자처럼 행세하면서 부패와 타락을 일삼고도 천국 백성임을 자부하는 자들 앞에서 제국 교회에 내려진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보다는 그 범죄에 압도당한 듯하다. 로마 사회 상류층 기독교인의 부패와 타락의 현장에서 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이 ‘이미’ 확보되었다는 주장은 용납할 수 없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한 편에 달렸던 강도를 천국으로 보내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와 그 권위 있는 말씀이 그를 지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 나타난 행위를 통해 주권적으로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의 위대한 심판 사역을 펠라기우스는 기꺼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인가?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 말씀의 심판 역사가 권위 있는 은혜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받을 수 없다면, 펠라기우스의 한탄은 나의 한탄일 수밖에 없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266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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