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설교의 문제점과 대안(2)
3.4 성경적 설교의 대안모색
한국교회 설교 강단은 너무도 훼손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손에 의해 심하게 조작되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설교의 원형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정한 설교의 원형적 대안은 무엇인가?
1. 설교의 본질 회복
모든 일의 회복은 본질로 돌아가는 일이다. 본질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수록 지금의 관행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근본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인간은 전통과 관행의 포로이다. 화장실 안에만 있으면 냄새를 못 느끼듯 전통과 관행 안에서만 있다면 문제를 문제로 느끼기 어렵다. 따라서 전통과 관행을 근본적으로 검사할 수 있는 객관적이며 초월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즉 설교관행의 옥석을 분별하기위해서는 그것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계시의 말씀 즉 성경이 필요하다.
따라서 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설교의 본질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의 고유한 논리와 가르침에 경청해야한다. 설교란 인간의 자기 사상의 펼침이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상이신 계시 진리를 그대로 선포하는 일이다. 즉 설교란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을 가감없이 증거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설교의 본질을 묻는 질문은 그 설교의 내용이 되는 성경이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설교의 기본이 되는 신학의 기본에 대한 실력이 엄밀하게 검증된다. 모든 것은 기본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 달려있다. 성경의 주제와 목적에 대한 근본적이고 심도있는 신학적 이해에 따라 설교의 깊이와 포괄성이 논의될수 있는 것이다.
지면의 제한으로 이 점을 깊이 있게 논할 수 없다. 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심원하고도 놀라운 논리와 깊이의 세계, 즉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위대하심을 끝없이 깨달아가는 일이다. 그것은 이론적인 작업이면서 동시에 삶의 과정을 겪으면서 깊어지는 세계이다. 이일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험해가듯, 성경이 담고 있는 진리의 세계를 추구하는 존재가 바로 설교자이다. 모름지기 설교자는 그 세계 안에 기기묘묘한 광경과 맛을 본 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그 세계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글로 이루어져 있기에 문학적인 작품이다. 또한 그것은 언제나 역사를 방편으로 한다. 그래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성경은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문학적이며 역사적인 방편을 통해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위대하신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 기자들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목적이다.
설교란 이러한 성경의 기록목적에 목숨을 거는 행위이다. 활쏘는 사람의 시선은 오로지 과녁판이듯이 설교자에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위대하심이외의 어떤 다른 목적도 설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말씀을 선포하는데 사용되는 설교의 방편들 즉 예화, 삶의 경험, 세상적 지식 등은 최소화되어야 하고, 오직 성경의 본문에 충실해야한다. 그 안에 기기묘묘하게 담긴 하나님 증거의 길을 찾아가는 행위가 바로 설교의 본령이다.
마치 애인과의 사귐 속에서 깊은 사랑의 언어와 감정을 나누지 못하게 되면 자연스레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처럼, 성경의 깊이와 고귀한 가치를 깊이 모르면 언제나 성경 자체보다는 다른 내용과 방향으로 설교가 뒤틀리고 산만해진다. 실제 성경의 본문 안에 담겨 있고 그 본문이 궁극적으로 의도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놀라운 속성은 복음의 생명 그 자체이므로 아무리 반복하더라고 지루하거나 식상하지 않다. 그것은 결코 물리지 않는 하늘의 양식이다. 한국교회 설교는 이점을 깊이 알아차리지 못한 채 공허하고 알맹이가 없다.
사랑하는 어머니가 동일한 방식으로 해주는 정상어린 흰밥과 보글거리는 된장찌개가 물리는 법이 있는가! 설교는 이처럼 담백하고도 맛깔스러운 어머니의 사랑의 밥상처럼, 순수하고 고귀한 하늘의 양식이신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심도있게 증거하는 신기하고도 놀라운 세계이다. 이런 설교의 본질이 새롭게 회복되어야 한다.
2. 올바른 성경해석은 설교의 기본 바탕
성경의 본래 기록 목적은 언제나 해석의 작업을 통해 드러난다. 이점에서 성경은 한편으로는 명백한 진리를 담고 있지만 다른 편에서 보면 감취어진 보고이다. 예컨대 보물섬은 그 길을 찾은 사람에게는 엄청난 가치이지만 그 보물섬에 이르는 길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이요, 미지의 환상일 뿐이다.
성경에 드러나 있는 진리의 세계는 인간의 이성적 지혜로 연구해서 읽혀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바른 진리에 이르는 해석의 길을 성경 안에 가르쳐 주시고 그 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신다. 이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려고 진리의 영, 즉 진리해석의 영이신 성령을 우리 안에 부어주신 것이다.
이점에서 성경은 다른 일반적인 책과는 전혀 그 품격과 목적을 달리한다. 즉 성경은 해석의 원리를 성경 안에 내축하고 있는 절대적인 책이다. 여타 어떤 해석의 원리를 밖에서 가지고 오는 것을 거부한다. 이것이 이른바 성경의 내재적 해석의 원리이다. 어떤 성경 밖의 해석 원리를 가지고서는 성경을 정당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뜻이다.
“보물섬에 이르는 길과 방법이 담긴 지도”가 “보물섬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보물섬을 만들고 그 안에 지도를 넣어 놓은 보물섬 주인의 허락과 알려주는 사역이 없이는 그 보물섬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보물섬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알수 있는가? 그것은 그 보물섬으로 이르는 길을 알고 있는 존재가 보물섬 밖에 있는 존재에게 가르쳐 주는 길 밖에 없다. 이를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 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 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 없느니라.(마 11: 25~27)
위의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인 진리를 하나님 아버지는 세상의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와 같은 자기 백성에게는 “나타내신다”. 이것이 진리 인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올바른 해석은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있으며 그 해석의 길을 예수님은 명백하게 성경 안에 밝혀 놓으셨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바라보되 그것은 “나를 가르쳐 기록된 것”(요 5:39)이라고 증거하심으로 구약은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가르치고 있음을 명백히 한다. 즉 구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언약이며 신약은 그리스도에 관한 성취임을 명백하게 하고 있다.
또한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요 14:9)”라고 증거하셨다. 즉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존재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하신 분이심을 알게 된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성경은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증거 하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자기를 계시하신다.
정리하자면 구약은 그리스도 사건의 언약이며 신약은 그리스도 사건의 성취임을 통해 하나님이 여호와, 즉 아버지이심을 성경의 내적 논리와 증거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은 신약에 비추어 신약은 구약에 비추어 해석해야만 한다. 이것이 성경해석의 기본 틀인 셈이다.
이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은 여호와 되심” 이것이 성경의 근본적인 주제이며 그 주제를 구체적으로 역사가운데 입증하는 것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심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설교, 즉 성경을 근간으로 하는 설교는 이 해석의 맥락을 벗어나면 안된다.
하나님이라는 이름만을 많이 운운하는 것이 대수가 아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설명하기위해서는 성경의 기본 계시의 방법인 그리스도 중심의 언약과 성취의 논리를 따라 해석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 그리고 그의 전능하심으로 역사가운데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여호와, 우리 아버지이심을 증거할수 있게 된다. 이를 우리는 언약-성취사적 성경해석의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성경해석의 원리를 견고하게 유지할 때 설교는 참으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심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는 복음적 설교가 될 것이다.
3. 설교의 바른 태도
설교는 인간 설교자가 하지만, 실상 그 일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따라서 인간 설교자는 사실 청중을 향한 설교를 하면서도 자신이 그 설교를 통해 배워가는 청중의 한 사람이다. 아니 가장 중요한 청중의 한사람이다. 자신의 설교에서 진리의 자유하게 하는 능력을 느끼지 못한다면 청중에게도 참 자유함을 전할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설교자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 수없는 죄인이요,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너무도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설교의 진정성을 점검함에 있어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설교자 자신이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인도와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진정으로 깨닫고 인격 깊숙한 곳에서 감격할 때에만이 생명력있는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이를 복음의 증인이라고 표현하였다. 증인은 실제 사건을 목격한 체험자라는 뜻이다.
설교에서 전하고자 하는 복음은 인간이 다루거나 조작 가능한 논리가 아니다. 복음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신 역사요, 그리스도라는 부활의 인격 안에 역사하는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다. 인간 설교자는 그런 영원한 생명을 조작적으로 다룰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그분이 찾아오시고 그분의 영원한 능력과 생명이 설교자를 사로잡아 그 입을 통해 증거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야 말로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자리이다.
이러하기에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런 자리이다. 그러므로 원칙적으로 설교에는 인위적인 기교, 인간 자신의 경험의 자랑, 내가 설교를 통해 성도를 설득시키거나 변화시켜야겠다는 오만 등이 자리 잡을 수 없다. 설교는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한 하늘의 진리를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뜨겁게 체험하는 복된 자리이자, 인간의 허탄한 자기 영광과 자아실현의 욕망의 자리가 될수 있는 가장 위험한 자리이다. 오직 성령 하나님의 인도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거룩한 사역이다.
4. 결론
한국교회 강단이 얼마나 부패되고 세속적 욕망이 분출되고 있는 자리인 것은 이미 세상에도 알려지고 있다. 한국교회의 개혁은 설교의 개혁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설교는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진정한 근원지인 것이다.
모든 설교자는 실수할 수 있으며 자신의 부족한 설교를 통해 점차 배워가는 존재이다. 그러나 설교의 원칙을 분명히 세우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경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언약 성취의 논리를 통해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위대한 속성을 증거하기, 이에서 벗어나면 설교의 본질에서 빗나가게 된다.
참으로 설교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으로 거룩한 도구로 쓰여질 때 깊이 있고 생명력있는 설교를 해 갈수 있을 것이다. 즉 진리를 전파하는 참된 설교란 결코 인간의 일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사역의 열매가 아닌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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