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0-03-05 14:0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10,교회생활 및 운영의 문제점과 대안(3)


3) 이원론적 신앙생활의 문제점과 대안.

"이원론적 신앙양태는 하나님 중심의 올바른 세계관 정립의 부재로 말미암는다"

  이원론적 교회생활의 문제점이란 교회와 세상을 공간적으로 분리하여 교회당이라는 공간은 거룩하고, 세상은 세속적이라는 그릇된 가치체계에 의해 살아가는 신앙양태를 의미한다. 이런 가르침에 의하면 교회당 밖의 생활공간은 신앙의 영역에서 무시되거나 경시된 채 교회당(예배당) 생활에 과도하게 치우친 문제점을 낳는다. 이는 삶의 전 영역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니다. 절름발이 신앙생활인 셈이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올바른 세계관 정립의 부재로 말미암는다.

  이 문제점은 매우 뿌리가 깊고 고질적인 병폐이어서 진단과 치유가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문제가 깊이 은폐되어 있어서 심도 있는 분석과 검토를 거치지 않으면 문제의 성격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이원론적 가치관과 세계관에 세뇌된 성도는 교회생활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전부인양 과도한 열심을 낸다. 그리고 교회당 중심의 편협된 세계관을 가진 병든 지도자는 그것을 부추기고 스스로도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으로 속는다. 그 결과 삶 전체의 균형을 잃어버린다. 이런 교회생활은 저돌적이고 열심이 있어 보이지만 하나님 중심의 진정한 신앙인격의 성숙이 보이지 않는다.

이원론적 신앙의 역사적 연원

  이런 이원론적 신앙을 어디로부터 기인했는가? 그 역사는 뿌리가 매우 깊다. 초대교회 교부시대를 지나 중세에 이르러 플라톤 철학의 영향아래 영육이원론의 가치가 주입되었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속되고 더럽다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이 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적 구조로 확장되어 ‘영혼의 문제를 다루는 교회’는 거룩하고, ‘육체가 거하는 세상’은 부정하다는 생각으로 고착된 것이다.

  이른바 중세 수도원운동은 이런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의한다. 세상보다 교회가 더욱 거룩하고, 교회보다 수도원에 들어가 명상하며 기도하는 삶이 더욱 거룩하다는 관념이 지배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세적인 성속이원론이다. 여기에 중세 성직주의(clericalism)까지 가세하여 이원론적 사고방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즉 교회에서 이른바 성직이라는 명분으로 신령한 일을 수행하는 신부의 교직계급이 형성되고 세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평신도라는 구분에 의해 이원론적 사고방식을 깊이 뿌리를 내렸다.   

  이원론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한 일서2:5) 라는 말씀에 나오는 “세상”을 장소적인 개념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때의 세상은 장소적 의미가 결코 아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세속주의적 가치를 의미한다. 

종교개혁에 의한 극복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 개혁의 선봉장 이었던 루터는 허구적인 이원론을 근원에서 비판하고 이른바 만인제사장의 진리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모든 성도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리하여 누구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왕같은 제사장임을 주장하게 되었다. 성직과 평신도라는 이원적 허구적인 구분이 철폐되었다.

  뿐 만 아니라 교회 내의 교직자들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직업이 거룩한 직업 즉 성직임을 주장하는 개혁적인 주장을 했다. 이런 종교개혁은 성경적인 주장은 16세기 이후 부패하고 타락한 중세교회를 전면적으로 개혁했을 뿐 아니라 중세의 이원론적 가치체계를 전복시킴으로서 세상과 문화를 바라보는 전혀 새로운 안목을 가져왔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으로부터 다시 가톨릭적 이원론으로 회귀하고 있어 보인다. 교회당을 성전이라고 주장하고 목사를 성직자로 부르며, 교회당안에서의 신앙을 신앙생활의 전체인 것으로 간주하는 뒤틀린 신앙의 양태를 보인다. 이미 개신교 안에도 성도들을 평신도라고 부르는 것이 상당히 일반화되었다. 이는 종교개혁정신의 퇴색이다. 

예배에 대한 오해와 극복

  성속이원론에 근거한 신앙양태에서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문제점은 “예배에 대한 비성경적 관념”이다. 일반적으로 불리는 예배당이란 말에서 그 문제의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어떤 특정의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관념에서 성도가 모이는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구약시대 성전의 개념을 그대로 예배당으로 대입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히브리서가 배격하는 대로 유대주의적인 잔재이며 가톨릭적 예배개념일 뿐이다. 구약의 모든 제사제도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신약 시대 예배당을 구약의 성전으로 간주하는 것은 복음진리에 대한 훼손이다. 구약의 성전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으로 성취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46년 된 웅장한 성전을 보고 예수님은 “그 성전을 헐라 사흘 동안에 일으키겠다” 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바로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증거한다.(요한 2:18~22)

  그렇다면 신약시대의 예배란 무엇인가? 바울의 가르침대로 신약적 예배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롬 12:1)를 가리킨다. 이는 특정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이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총체적인 예배”를 뜻한다. 즉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고, 믿음의 분량대로 생각하며, 은사 따라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삶 자체를 의미한다(롬 12:2~21). 

  그것은 반드시 예배당이라는 장소에 결코 국한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 전체에 편만된 예배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문화공간이든 간에 교회당이든 간에 하나님의 주권아래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과 삶의 영역에 진정한 예배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가르친다(고전 10:31). 즉 먹고 마시는 일상적 삶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로서의 신앙생활임을 가르쳐준 것이다.

성경적 대안

  "포괄적인 세계관에 의해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을 배우고 경외하는 신앙생활이요 예배생활이라는 기독교 진리의 확산이 너무도 절실하다"

  이원론적 신앙의 행태에 대한 극복은 어떤 세계관적인 진리의 근거에서 가능한가? 성경이 가르치는 세계관은 도무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이원론적 신앙의 문제점은 이원론적 세계관의 틀에 의해 생겨난다. 즉 교회당 안은 선하고 거룩하며 세상은 악하다고 하는 그릇된 이원론으로부터 야기된 문제점이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과 싫어하시는 악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가치 판단으로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선택하시고, 하나님이 싫어하심을 따라 불택자들을 주관해 가신다.

  모든 피조 만물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존재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방편들이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적 역할을 했던 애굽의 바로 권세도 하나님의 이름, 즉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로마서는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전파되게 하리라 하셨으니”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모든 것이 존재하며 하나님은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신다(잠 16:4).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세계관적인 틀로 바라 볼 때 모든 삶의 영역이 주권자 되시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교회 아래 놓여 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만물위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령한 교회’와 ‘피조된 만물로서의 세상’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는 신령한 교회는 만물위에 존재하며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원천이다.(엡 1: 22~23) 이때의 교회는 보이는 의미의 제도적 교회가 아니라 보편적인 신령한 교회를 의미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이런 신령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결국 세상 안에 살아가는 모든 일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며 그것을 궁극적으로 만물과 교회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은혜의 통치를 배우게 하시려는 것이다. 가정 일이든 세상의 직장 일이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예배요 신령한 교회생활로 포섭된다. 그러나 교회당 안에서 하는 일이라도 그것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 그것은 자기 숭배의 일이 되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교회당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정과 사회생활, 그리고 교회당 생활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교회당 중심적인 편협된 신앙의 양태에서 벗어나 만물과 신령한 교회를 통치하시는 포괄적인 세계관의 정립을 통해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경외하는 신앙생활을 지향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약시대 복음적 예배생활이라는 성경적 가르침의 확산은 참된 신앙의 성숙을 갈망하는 한국교회에 너무도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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