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서언:왜 이 질문이 절실한가?
한국교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현금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절망적 아픔이 서려 있고, 또한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향한 희망적 전망을 담고 있다. 참으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로 이천년 기독교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교회의 부흥을 일구어 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기독교가 참으로 올바르게 전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금할 길 없다. 수많은 신학교의 난립 가운데서도 신학의 정체 혼미, 교회 밖으로 부터의 질시와 조롱, 교회 내부에서의 균열과 분열, 지도자의 사제주의화, 교회 운영의 천민자본주의화 등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차원의 역사를 준비하신다. 아합 시대 엘리아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고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한 후 이세벨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도피 중에 지쳐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칠천인을 남겨두었다고 대답하셨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와 교회를 어둠의 도전과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지키고 사랑하시되, 언제나 순수한 진리와 교회의 거룩성을 갈망하는 새로운 손길을 준비시키고 그 손길을 통해 개혁의 물결을 이루어 가신다.
한국 교회의 저변에는 도처에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있으며, 나름대로 현존 신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성경적 신학의 정립을 시도하는 건전한 운동들이 감지된다. 게다가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한 건전한 몸부림과 시도들이 있다. 뿐 만 아니라 순수한 정열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교의 정열을 불태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이 글은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과 움직임을 민감하게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 속에서 절실하게 찾아보려는 한 시도이다.
문제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인정이 없이는 교회는 새롭게 전진할 수 없다. 성경은 이를 포괄적인 용어로 “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한다. 신학적으로 회개란 자기연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고 깊이 알지 못해 생겨난 자기중심적인 죄악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감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급진적인 변화”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하여 성령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이다.
문제의 인식과 대안의 모색은 중첩되는 점도 있지만 별개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분석하고 검토하되 문제의 인식과 대안의 모색을 균형있게 밝히고자 한다. 문제에 대해 절실한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대안 모색은 지속력이 없으며, 대안 없는 문제 지적 역시 자칫하면 자기파괴적인 비난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 글에서는 한국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서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여러 가지 항목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신학적 문제와 대안
2-1.신학적 문제를 진단하는 기준
우선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신학적 문제점이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기초로 하는 신학적 문제점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밝혀내기 위해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 혹은 원칙을 필요로 한다. 물론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긴 학문적 논의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매우 담백하고도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원칙적인 기준에 비추어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을 점검하기로 한다.
신학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하나님 이해하기와 경외하는 일”이다. 이런 개략적인 신학의 이해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담고 있다. 첫째, 성경은 반드시 “전체로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성경은 66권으로서 여러 기자들을 통해 기록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은 그 성경을 한권으로 의도하시고 그렇게 집대성하였기에 성경의 진정한 의미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속성은 언제나 원칙적으로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성경해석의 파편화 현상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작업인 신학은 결국 성경 해석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성경 해석의 파편화를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 알아가기라는 신학적 근본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의 통전성(wholeness)을 구축할 수 없다.
둘째, 신학은 순수 이론적인 작업에 머물 수 없으며 그것은 실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론과 실제의 분리현상은 서구 학문 혹은 서구 철학의 잔재이다. 인간의 이성적 작업을 통해 구성된 이성적 학문의 결과는 언제나 자신이 처한 입장 혹은 상황을 초월할 수 없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편견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론은 삶의 실재(reality)를 온전하게 반영할 수가 없으며 궁극적으로 실제의 삶과는 분리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학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이성적 작업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물론 성령은 인간의 중생한 이성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게 함으로 신학의 작업에 인간의 중생한 이성이 사용되기는 하여도 영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은 일반 학문의 과정과는 달리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관에 의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고 우리 안에 역사하여 성경의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밝히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속에 역사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이론으로서의 진리는 그 자체가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어둠을 밝히고, 인간의 죄악된 어리석음을 타파하여 새로운 지혜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진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상을 경외하며 살아가던 인생으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확인해본 신학의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초에 대해 분석하고 점검하고자 한다.
2-2.한국교회 신학의 문제점
첫째, 신학의 파편화 즉 성경이해의 파편화이다.
단마디로 말해 신학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생명 있는 유기적 지식과는 거리가 먼 파편화된 논리들의 집합체가 되고 있다. 수많은 신학교가 난립되어 있으며 신학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지만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토록 많은 신학적 작업들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총체적인 그림으로 수렴되기 보다는 너무도 산발적이고 파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신학적 연구가 소모적이며 신학자들 간에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한국 교회에 어떤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 주고 있는가? 이는 한국 교회를 염려하는 모든 성도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주제이다. 오늘날 신학의 귀족화 혹은 사제주의화로 인해 일반 성도들(일반적으로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구교적인 잔재로서 비성경적 용어이다)은 신학적 작업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 사상에 정면으로 상반된다. 모든 성도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할 이유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신학적 작업의 원칙과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왜 신학 작업이 그토록 파편화되고 있는가? 그 이유는 크게 보아 서구신학의 영향과 잔재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후 지난 오백년의 신학의 역사를 검토할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개신교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을 그 기원으로 한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당대 카톨릭 신학의 허구를 간파했었으며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다. 루터는 성경에서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도출했고, 칼빈은 루터를 뛰어 넘어 보다 포괄적인 하나님 중심의 신학 이론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그 당대의 기준에 비추어 볼때 대단한 작업을 수행했고, 그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강력한 진리운동을 감행한 것이다.
이런 종교개혁사상을 계승하고자 했던 17세기 정통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18세기 서구 지성사의 중요한 계기인 계몽주의가 발흥했다. 이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중요한 변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란 서양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촉발된 사상운동으로서 하나님의 계시 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한 철학운동이었고, 그 정점에 칸트(I. Kant)가 있다. 칸트이후 학문은 분화되었고, 그것이 서구 과학적 학문의 대세를 형성했다. 이런 서구 지성사의 흐름은 신학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현대적 의미의 학문분화는 대세를 형성했고, 20세기에 와서 분과학문으로서의 과학은 부동의 진리기준처럼 행세했다. 그것이 이른바 최근에 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인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른바 세상에 대한 거대담론(meta-narrative)의 퇴조를 의미한다. 이런 서양의 현대사상 혹은 현대학문의 조류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지구촌 현상을 만들었다. 그런 강력한 대세와 영향력 속에서 신학도 파편화된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라는 다양한 학문분과이다. 그리고 각 분과는 다시 더욱 세분화되어 수많은 하위 분과학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학의 분야에도 수많은 하위 분과의 전문화 현상이 생겨 낳고 그것은 일반 현대학문의 세분화 현상과 맞물려 돌아갔다. 이것은 참으로 신학의 비극적인 퇴행이었다. 일반 학문의 분과화와 전문화는 어떤 점에서 이해 가능하다. 세계 전체를 전체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실제적인 난점이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특정 분야 혹은 영역을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과학적 접근은 한편 알고 보면 정당한 시도 일수 있다.
그러나 신학은 그럴 수 없다. 신학의 근본 원천이 되는 성경은 그 전체로서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 별개로 연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존신학에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 분리된 채 연구되며 구약신학 안에서도 더 세분화되어 그 세분화된 영역에서 박사가 나온다. 이는 참으로 웃지 못할 이야기이지만 두루 넓게 아는 ‘박사’가 아니라 자기 분야만을 좁게 아는 ‘협사’가 되고 만다. 이는 참으로 신학의 파편화를 의미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학의 지리멸렬이다.
이런 신학의 파편화된 흐름과 전개가 신학교 강단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하여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복잡하고 난삽한 신학이론에 치여 성경을 읽고 성경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확인하고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한국 신학교 현상의 보편적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교회 강단의 부실화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담백하고 깊이 있는 신학에 의한 성경의 이해, 이것이 너무도 목마른 한국교회의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저급한 학문적 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치부된다. 서구에서는 성경은 가장 저급한 수준의 치부되는 성경 대학(Bible College)에서나 읽고 가르치지 적어도 신학교(Seminary)나 유수한 신학대학(University)에서는 전혀 다른 식의 접근을 한다. 즉 성경 그 자체의 통일된 논리와 구조,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해석하고 파헤쳐 가기 보다는 신학자들의 신학이론을 소개하고 연구하며, 또한 신학 이론에 영향을 주는 잡다한 세속적인 학문의 흐름을 따라 잡는 것이 주된 임무로 되어 있다. 이런 서구 신학의 파편화와 혼돈 경향이 그대로 한국에 무비판적으로 유입된 것이다.
이렇게 신학의 흐름 즉 성경이해의 파편화 현상은 한국의 신학교에 보편화되었고, 그 영향은 설교강단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한국 교회 내에 “성경 통독운동” 혹은 “성경의 맥을 잡아라” 등과 같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중시하여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고, 신학 이론보다는 성경 그 자체를 가르치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제제기적인 시도로서는 의미를 가지지만 그런 시도가 성경 그 자체가 증거하는 견실한 신학적인 기준과 내용을 가지고 추구되지 못했다. 현재 한국 교회 전반을 지배하는 신학은 파편적인 접근이 주종을 이루고 거의 대다수의 교회 강단은 그런 신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신학적으로 갈 길을 상실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한국교회, 신학적으로 갈길 상실
1.서언:왜 이 질문이 절실한가?
한국교회,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는 현금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절망적 아픔이 서려 있고, 또한 동시에 새로운 출발을 향한 희망적 전망을 담고 있다. 참으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로 이천년 기독교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교회의 부흥을 일구어 내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기독교가 참으로 올바르게 전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금할 길 없다. 수많은 신학교의 난립 가운데서도 신학의 정체 혼미, 교회 밖으로 부터의 질시와 조롱, 교회 내부에서의 균열과 분열, 지도자의 사제주의화, 교회 운영의 천민자본주의화 등은 한국 교회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새로운 차원의 역사를 준비하신다. 아합 시대 엘리아가 하나님으로 부터 보냄을 받고 갈멜산에서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한 후 이세벨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고 도피 중에 지쳐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간구했을 때 하나님은 칠천인을 남겨두었다고 대답하셨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와 교회를 어둠의 도전과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지키고 사랑하시되, 언제나 순수한 진리와 교회의 거룩성을 갈망하는 새로운 손길을 준비시키고 그 손길을 통해 개혁의 물결을 이루어 가신다.
한국 교회의 저변에는 도처에 진리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있으며, 나름대로 현존 신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성경적 신학의 정립을 시도하는 건전한 운동들이 감지된다. 게다가 한국 교회의 개혁을 위한 건전한 몸부림과 시도들이 있다. 뿐 만 아니라 순수한 정열을 가지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선교의 정열을 불태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이 글은 한국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경륜과 움직임을 민감하게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오늘의 교회 현실 속에서 절실하게 찾아보려는 한 시도이다.
문제에 대한 정직한 인식과 인정이 없이는 교회는 새롭게 전진할 수 없다. 성경은 이를 포괄적인 용어로 “회개(메타노이아)”라고 한다. 신학적으로 회개란 자기연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고 깊이 알지 못해 생겨난 자기중심적인 죄악의 삶으로부터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감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급진적인 변화”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근거하여 성령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이다.
문제의 인식과 대안의 모색은 중첩되는 점도 있지만 별개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 글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분석하고 검토하되 문제의 인식과 대안의 모색을 균형있게 밝히고자 한다. 문제에 대해 절실한 아픔을 공유하지 않는 대안 모색은 지속력이 없으며, 대안 없는 문제 지적 역시 자칫하면 자기파괴적인 비난에 그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앞으로 글에서는 한국 교회가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서 반드시 검토되어야 할 여러 가지 항목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2.신학적 문제와 대안
2-1.신학적 문제를 진단하는 기준
우선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한국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신학적 문제점이다. 우리는 한국 교회가 기초로 하는 신학적 문제점을 명료하게 분석하고 밝혀내기 위해 신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 혹은 원칙을 필요로 한다. 물론 신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긴 학문적 논의를 필요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매우 담백하고도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고, 그 원칙적인 기준에 비추어 한국교회의 신학적 문제점을 점검하기로 한다.
신학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 전체를 통해 하나님 이해하기와 경외하는 일”이다. 이런 개략적인 신학의 이해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원칙을 담고 있다. 첫째, 성경은 반드시 “전체로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성경은 66권으로서 여러 기자들을 통해 기록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은 그 성경을 한권으로 의도하시고 그렇게 집대성하였기에 성경의 진정한 의미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속성은 언제나 원칙적으로 부분에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파악되어야 한다. 이를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이른바 성경해석의 파편화 현상을 극복할 수 없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작업인 신학은 결국 성경 해석의 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성경 해석의 파편화를 가지고서는 결코 하나님 알아가기라는 신학적 근본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의 통전성(wholeness)을 구축할 수 없다.
둘째, 신학은 순수 이론적인 작업에 머물 수 없으며 그것은 실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생명의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론과 실제의 분리현상은 서구 학문 혹은 서구 철학의 잔재이다. 인간의 이성적 작업을 통해 구성된 이성적 학문의 결과는 언제나 자신이 처한 입장 혹은 상황을 초월할 수 없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편견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론은 삶의 실재(reality)를 온전하게 반영할 수가 없으며 궁극적으로 실제의 삶과는 분리되는 운명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학은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이성적 작업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다. 물론 성령은 인간의 중생한 이성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게 함으로 신학의 작업에 인간의 중생한 이성이 사용되기는 하여도 영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신학은 일반 학문의 과정과는 달리 성령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관에 의한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오셨고 우리 안에 역사하여 성경의 진리를 이론적으로만 밝히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속에 역사 한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대로 이론으로서의 진리는 그 자체가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있어 어둠을 밝히고, 인간의 죄악된 어리석음을 타파하여 새로운 지혜의 삶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성경의 진리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상을 경외하며 살아가던 인생으로 하여금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이 확인해본 신학의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한국교회의 신학적 기초에 대해 분석하고 점검하고자 한다.
2-2.한국교회 신학의 문제점
첫째, 신학의 파편화 즉 성경이해의 파편화이다.
단마디로 말해 신학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생명 있는 유기적 지식과는 거리가 먼 파편화된 논리들의 집합체가 되고 있다. 수많은 신학교가 난립되어 있으며 신학적 작업을 수행하고 있지만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그토록 많은 신학적 작업들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총체적인 그림으로 수렴되기 보다는 너무도 산발적이고 파편화되고 있다. 그래서 신학적 연구가 소모적이며 신학자들 간에 소통이 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것은 한국 교회에 어떤 심각한 문제점을 던져 주고 있는가? 이는 한국 교회를 염려하는 모든 성도가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주제이다. 오늘날 신학의 귀족화 혹은 사제주의화로 인해 일반 성도들(일반적으로 평신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구교적인 잔재로서 비성경적 용어이다)은 신학적 작업에서 소외되어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 사상에 정면으로 상반된다. 모든 성도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야할 이유가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신학적 작업의 원칙과 원리를 알고 있어야 한다.
왜 신학 작업이 그토록 파편화되고 있는가? 그 이유는 크게 보아 서구신학의 영향과 잔재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6세기 종교개혁이후 지난 오백년의 신학의 역사를 검토할 이유가 있다. 역사적으로 개신교 신학은 16세기 종교개혁을 그 기원으로 한다. 16세기 루터와 칼빈은 당대 카톨릭 신학의 허구를 간파했었으며 성경으로 돌아가기를 염원했다. 루터는 성경에서 이신칭의의 구원론을 도출했고, 칼빈은 루터를 뛰어 넘어 보다 포괄적인 하나님 중심의 신학 이론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그 당대의 기준에 비추어 볼때 대단한 작업을 수행했고, 그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강력한 진리운동을 감행한 것이다.
이런 종교개혁사상을 계승하고자 했던 17세기 정통주의 시대를 지나면서 18세기 서구 지성사의 중요한 계기인 계몽주의가 발흥했다. 이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중요한 변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18세기 계몽주의란 서양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촉발된 사상운동으로서 하나님의 계시 보다는 인간의 이성을 절대시한 철학운동이었고, 그 정점에 칸트(I. Kant)가 있다. 칸트이후 학문은 분화되었고, 그것이 서구 과학적 학문의 대세를 형성했다. 이런 서구 지성사의 흐름은 신학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를 지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현대적 의미의 학문분화는 대세를 형성했고, 20세기에 와서 분과학문으로서의 과학은 부동의 진리기준처럼 행세했다. 그것이 이른바 최근에 와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시대적인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른바 세상에 대한 거대담론(meta-narrative)의 퇴조를 의미한다. 이런 서양의 현대사상 혹은 현대학문의 조류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지구촌 현상을 만들었다. 그런 강력한 대세와 영향력 속에서 신학도 파편화된 작업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것이 이른바 성경신학, 조직신학, 역사신학, 실천신학이라는 다양한 학문분과이다. 그리고 각 분과는 다시 더욱 세분화되어 수많은 하위 분과학문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학의 분야에도 수많은 하위 분과의 전문화 현상이 생겨 낳고 그것은 일반 현대학문의 세분화 현상과 맞물려 돌아갔다. 이것은 참으로 신학의 비극적인 퇴행이었다. 일반 학문의 분과화와 전문화는 어떤 점에서 이해 가능하다. 세계 전체를 전체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실제적인 난점이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특정 분야 혹은 영역을 세분화하여 이해하려는 과학적 접근은 한편 알고 보면 정당한 시도 일수 있다.
그러나 신학은 그럴 수 없다. 신학의 근본 원천이 되는 성경은 그 전체로서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 별개로 연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존신학에서 구약신학과 신약신학이 분리된 채 연구되며 구약신학 안에서도 더 세분화되어 그 세분화된 영역에서 박사가 나온다. 이는 참으로 웃지 못할 이야기이지만 두루 넓게 아는 ‘박사’가 아니라 자기 분야만을 좁게 아는 ‘협사’가 되고 만다. 이는 참으로 신학의 파편화를 의미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학의 지리멸렬이다.
이런 신학의 파편화된 흐름과 전개가 신학교 강단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하여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욱 복잡하고 난삽한 신학이론에 치여 성경을 읽고 성경 안에서 생명의 말씀을 확인하고 묵상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한국 신학교 현상의 보편적 현상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결국 교회 강단의 부실화를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담백하고 깊이 있는 신학에 의한 성경의 이해, 이것이 너무도 목마른 한국교회의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학교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저급한 학문적 수준을 나타내는 것으로 치부된다. 서구에서는 성경은 가장 저급한 수준의 치부되는 성경 대학(Bible College)에서나 읽고 가르치지 적어도 신학교(Seminary)나 유수한 신학대학(University)에서는 전혀 다른 식의 접근을 한다. 즉 성경 그 자체의 통일된 논리와 구조,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해석하고 파헤쳐 가기 보다는 신학자들의 신학이론을 소개하고 연구하며, 또한 신학 이론에 영향을 주는 잡다한 세속적인 학문의 흐름을 따라 잡는 것이 주된 임무로 되어 있다. 이런 서구 신학의 파편화와 혼돈 경향이 그대로 한국에 무비판적으로 유입된 것이다.
이렇게 신학의 흐름 즉 성경이해의 파편화 현상은 한국의 신학교에 보편화되었고, 그 영향은 설교강단에 강력하게 미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한국 교회 내에 “성경 통독운동” 혹은 “성경의 맥을 잡아라” 등과 같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중시하여 성경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가 있고, 신학 이론보다는 성경 그 자체를 가르치려는 시도도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제제기적인 시도로서는 의미를 가지지만 그런 시도가 성경 그 자체가 증거하는 견실한 신학적인 기준과 내용을 가지고 추구되지 못했다. 현재 한국 교회 전반을 지배하는 신학은 파편적인 접근이 주종을 이루고 거의 대다수의 교회 강단은 그런 신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고 있다. 이 점에서 한국 교회는 신학적으로 갈 길을 상실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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