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千年이 하루 같을 수 있나?
위 제목의 속뜻은 이런 관점이 있을 수 있나?이다.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가 있다. 이 말의 진의는 학수고대(鶴首苦待)를 하거나 그 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를 몹시 바랄 때에 느끼는 생각이며 관점이다. 이러한 관점이나 견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관이며 신관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 아니면 인간의 작품으로 보느냐?이다. 동시에 신이 존재하느냐? 없는 허구인가? 하는 것이다. 그 관점에는 입체적인 관점이 있을 수 있고 단면적인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위의 질문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문제가 들어 있다. 하나는 관점의 문제이고 하나는 그 관점에 의한 정도(程度)의 문제이다. 그 구체적인 논증이 시간의 문제이다. 그 시간의 본질은 관점에 의하여 정해진다. 그 형식은 일반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지금과 전(前)과 장차라고 표현되었다. 이 전은 과거를 의미한다. 천년이 하루다라는 말 자체에는 모순이 들어 있다. 이것이 언어의 신비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언어를 주셨다. 그리고 언어를 혼란케 하셨다.
오늘날 이러한 언어의 신비를 성경에 근거하여 연구하지 않기 때문에 혼란만 가중될 뿐이다. 수학적으로 천년이 하루라는 것이 증명되려면 성경의 자체논리인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근거할 때 가능하다. 여기서는 논리적인 목차에 주안점을 두고 연구하고자 하는데 대부분의 의미를 두고자 한다.
1)시작과 끝이 있는 천년
천하의 범사에 기한(期限)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전3장)고 한다. 천하의 범사에 기한이 있다는 것은 바로 시작과 끝이 있다는 의미이다. 그 시작과 끝의 근본은 창조에서 심판까지이다. 전도서 3장의 내용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것의 구체적인 실례는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시종을 증거하고 있다.
①선을 점으로 보는 시각(視角)
선(線)은 점(点)의 확대이며 연결이다. 동시에 점은 선의 요소이며 기초이다. 근본적인 시각의 차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전에는”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라는 뜻이다. 전도서에는 이러한 시각을 많이 밝히고 있다.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와 같은 것(6장)이다.
이런 차원에서 시각은 관점(觀點)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연결하는 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연결한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뿌리이며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뿌리가 되는 것은 영(靈)이나 영원성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다윗의 자손이 되는 것은 육이나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천년이 시작과 끝이 있는 선이면 하루는 그 선의 요소인 점인 셈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각각 예수 오시기 전 2000여년 1000여년 대의 자손이다. 성경은 이러한 1000년과 2000년이라는 선(시간)을 점(하루)로 보는 시각을 계시해 주고 있다.
②시작과 끝이 동일한 점(点)
전도서 6장에 “어떤 사람이 천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낙을 누리지 못하면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둘 다 같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냐?”라는 내용이 있다. 천년의 갑절은 2000년이다. 마침 지금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땅에 오신지 2000여년이 된 때이다.
지금 세계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구분을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남녀와 노소 그리고 인종 등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밀레니엄을 경험한 10세 이상과 2000년대 이후 출생자인 10세 이하로 구분할 수도 있다.
하루나 천년이나 2000년이나 입체적인 시각 앞에서는 모두 점과 같다. 그것은 시간의 본질이 점(点)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 시간은 시작과 끝이 동일한 점과 같다.
2)지나간 어제 같은 천년
여기서의 지나간의 의미는 없어지다나 사라지다의 의미다. 지나간 어제는 시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과거의 부분이다. 지나간 것은 어제의 일이다. 어제라는 하루가 천년일 수 있나? 이 질문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재삼 하게 되었다. 어제의 일은 없는 일이고 사라진 일이다. 원래 없는 것이 있는 것처럼 계시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시각과 시야가 어디에 근거하고 있나? 성경만이 이러한 시각을 제시하며 시야를 넓혀 준다. 성경은 거룩한 계시이며 영원한 계시이다.
①볼 수 없는 것이 없는 시야(視野)
육체의 눈은 앞만 보도록 앞에 달려 있다. 그러나 시간에 있어서 돌아보며 회고(回顧)한다라고 한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사고와 이성과 정신이다. 천년을 하루로 보고 하루를 천년으로 보는 시야가 있을 수 있나? 이 내용은 바로 이 글의 주제나 제목에 대한 더 자세한 풀이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간의 의미는 해명과 직시와 대비의 문제에 있다. 그 중에서도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천년이 하루 같다는 성경의 시야이다. 21세기인 지금은 세계가 100세 장수를 다 생각하는 때이다. 그 논지는 100세의 장수가 불행인가? 행복인가? 라는 것이다.
성경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심령의 즐거움으로 단언하고 있다. 깨닫는 것은 인간 생활의 핵이다. 시간의 양이 행불행의 기준이나 기초일 수 없다.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 여호와의 영(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만이 이러한 시야를 열어줄 수 있다.
②없는 것과 동일한 과거(過去)
없는 것과 동일한 과거라는 의미에는 어떤 관점(시각)에서는 시간은 없는 것이라는 본질이 들어 있다. 세상이 하나님의 목전(目前)에 있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신신당부한 말씀이 바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다. 이 한 가지는 성도들이 하나님 백성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영원한 날이다. 결국 있다와 없다는 단순한 ㅅ과 ㅂ의 차이를 넘어 성경이 계시하는 신(神)은 과연 존재하시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에까지 연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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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근호 목사 (중어중문학박사) 이메일 : yan825@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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