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09-06-16 14:1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Walter C. 카이저의 구약관(舊約觀)에 대한 비판적 고찰

『새롭게 본 구약』을 중심


『새롭게 본 구약』에 나타난
Walter C. 카이저의
구약관(舊約觀)에 대한 비판적 고찰

목            차

      Ⅰ. 구약과 기독교의 문제에 대하여
      Ⅱ. 구약의 학문성에 대하여
          1. 정경으로서의 구약
          2. 비평대상으로서의 구약
      Ⅲ. 구약과 신학에 대하여
          1. 하나님의 약속-계획으로서의 구약
          2. 메시아 입문서로서의 구약
          3. 구원의 계획으로서의 구약
      Ⅳ. 구약성경과 신자의 삶에 대하여
          1. 삶의 도(道)로서의 구약
          2. 선포의 주제로서의 구약
          3. 기독교인의 성경으로서의 구약
      Ⅴ. 종합적 평가
     
Ⅰ. 구약과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하여

1. 기독교인의 문제인 구약
  카이저는 기독교인의 문제인 구약에 대하여 먼저 구약 권위에 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기한다. 첫째로 구약은 과연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권위를 가지는가? 둘째로 그 권위를 어떻게 이해해야하며 그 권위의 내용들은 무엇인가? 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약의 권위에 대한 질문들은 구약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자들 때문이다. 이들은 구약을 개신교의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구약을 신약의 증거본문 수준으로 하락시켜 신약보다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서 쉴라이에르 마허(1768-1834)는 구약을 다음과 같이 경멸하고 있다. 우리 성경에서 구약이 차지하는 위치는 고작해야 신약성경의 증거 본문이 되는 것이나, 혹은 유대교의 회당이 기독교 예배의 역사적인 모체가 된 것 정도이다. 구약 성경은 신약이 가지고 있는바 규범이 될 정도의 위엄이나 영감을 공유하고 있지는 않다. 이와같은 부정적 견해에 대한 카이저의 논증은 신약 성경의 간략한 구절 인용과(마5:17-18, 롬15:4, 고전10:11, 딤후3:14-17), 영국교희의 39개조, 스코틀랜드 고백,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 등의 신조를 통하여 구약의 권위와 필요성의 근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카이저의 논증 방법은 구약의 근본적인 문제인 권위를 취급하는데 있어서 다소 협소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구약의 권위 입증을 신약 성경의 성구를 간략하게 인용하고, 전통적인 신조들에 의존하여 입증하려는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논증 방법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권위는 몇 개의 성구나 외부적 전통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천적으로 구약 자체에 기인한다. 이러한 명제에 대한 근거는 구약 내용 자체의 논리적 통일성과 신약과의 연관성을 통하여 충분히 제시되며 확실히 입증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마지막 결론에서 취급하고자 한다.

2. 구약이 기독교의 문제인 이유
  카이저는 구약의 영감성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영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역사비평적인 방법론을 강조하는 비평적인 연구의 영향으로 구약은 과거사에 지니지 않으며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구약을 기독교와 관련시키는 어떠한 진보도 꾀하지 못했으며, 구약이 과연 20세기 교회들이 당면한 문제와 필요와 문제점들에 대해서 적절한 해답을 권위있게 내려 줄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영감성에 대한 카이저의 사적 고찰은 타당하다고 본다. 그러나 영감성의 입증 방식에 대한 논증을 계속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3. 기독교인들의 문제로서 구약이 직면하고 있는 질문들

1) 구약의 하나님이 신약의 하나님과 같은 분인가 ?
  카이저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신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실례를 통하여 논증한다. 초대교회는 계시방식을(히1:1) 들어 역사적 연속성이 존재하며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강조했고, 칼빈은 하나님이 신구약에서 동일하게 말씀 하셨기 때문에 한 하나님을 제시하고 있다는 명제적인 주장을 했으며, 이아히로트는 하나님 나라를 중심으로 한 섭리의 목적을 통하여 구약은 약속이고 신약은 성취라는 구조적 관계에 의한 하나님의 동질성을 주장한다는 말을 인용함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신성의 조화를 설명한다. 그리고 구약의 야웨를 국가적인 神으로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일하는 세상적인 神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지상 모든 민족의 복이 되게 하려하심이며, 이스라엘의 외적인 축복은 은혜의 내적 사역을 지시해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카이저는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神性의 조화 문제에 있어서 계시 방법상의 차이와 이스라엘의 대표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동질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증 방법은 신구약의 관계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동질성을 입증하기에는 명쾌한 대답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계시의 방식에 의한 신적 동질성을 주장 한다면 또 다른 문제를 야기 시킨다. 즉, 신구약 시대에 계시 방식의 차이점을 두신 이유는 무엇이며, 신구약시대에 계시의 초점은 각각 동일한 것인가? 라는 문제이고, 이스라엘의 대표성에 대한 문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지상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게 하심이라면 복은 이스라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인가? 그리고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위치는 어디까지 이며, 현재에도 구약시대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섭리하시고, 직접적인 계시 방법을 통해서 섭리하시는가? 라는 질문이 계속된다.
  논자의 입장은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동질성을 계시 형식의 원리에서 찾아야 된다고 본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한분이시다. 다만 영원하신 존재를 피조세계-시간, 공간, 형상, 수로 계시된 세계-에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하여 섭리하신 계시의 방법상에 차이가 신구약 간의 시대별로 다를 뿐이지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이시며 동일하신 것이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게 하기 위한 원리적 형식은 언약과 성취의 구조를 통해서 계시하신다. 즉, 구약은 그리스도의 나라와 속성과 사역을 모형적인 방법으로 언약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 섭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언약하신 것이고, 구약에 계시된 하나님의 속성과 사역 내용은 신약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실 그리스도의 속성과 사역에 대한 언약의 내용들이다. 이와 같이 신약의 내용도 구약의 언약 내용들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나라와 속성과 사역들이 실체로 성취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망해 본다면 신구약에 다양하게 나타난 하나님이 같은 분 이시라는 본질의 표현을 하나로 조화시켜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2) 구약이 동일한 하나님을 계시하고 왕국의 계획을 약속하신 것이 연속성이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구약의 전부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카이저는 구약의 수용성에 대하여 구약의 텍스트들이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에 대해서 어떠한 교리와 도덕적 진리들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비로소 구약이 기독교인들에게 주고자하는 모든 것을 다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구약의 수용성에 대한 카이저의 견해는 타당하다. 그러나 논자는 구약의 수용여부에 관한 문제제기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그 계시의 말씀을 주신 시대와 대상과 방법에는 다양성이 있으나 신구약 성경을 주신 목적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한 단일목적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구약의 차등화나 수용성에 관한 문제가 더 이상 언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3) 성경의 약속과 계획이나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같을수 가 있겠는가?
  카이저는 약속의 대상에 따라서 약속에 대한 기대가 동일할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단어에 대한 의미 부여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대답은 문제의 단어에만 국한된 지엽적인 답변에 불과하다. 그러나 신구약 전체를 놓고 볼 때는 몇 개의 단어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계시내용의 전개방식의 문제이다. 즉, 언약의 내용인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하다. 다만 그 언약을 전개하는 방식에 있어서 구약은 계시내용을 이스라엘 나라를 통하여 모형적인 방식으로 전개하고 있으며, 신약은 동일한 계시의 내용을 그리스도의 나라를 통하여 실체적으로 구사하는 전개 방식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약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4) 신구약 성경은 신앙의 대상 구원의 방법, 죄와 회개의 신학, 신자들의 믿음생활들의 교리가
  두 성경 상에 너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각각 분리된 종교제도로 귀속될 수밖에 없는가?
카이저는 복음의 본질인 믿음의 교리를 통하여 두 성경상의 거리감을 해소할 수 있으며(창12:3의 아브라함의 약속과 갈3:8의 동질성), 구약이 신약에 선행된 것이기에 동일한 진리체계를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대한 논자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물론 두 성경상의 표면적인 차이는 당연히 인정해야 될 것이다. 예를 들면 구약의 죄용서 방법은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하여 시행되고, 신약의 죄용서 방법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시행된다. 이러한 차이점을 종교 제도적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은 신구약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구원의 방법인「믿음」으로 처리하기에는 미흡한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구약에는 구원과 무관한 다양한 사건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성경상의 차이점을 설명하려면 좀더 근원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될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언약사적 구도에 의한 원리적인 접근만이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구약과 신약이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본질적인 목적에는 차이가 전혀없다. 다만 구약의 모든 다양한 내용들은 메시아 보내실 것을 모형적으로 언약하는 것이며, 신약의 내용들은 구약에서 언약하신 메시아가 실체적으로 오신 것에 대하여 메시아 자신과 성령이 증거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언약과 성취라는 계시형식의 원리에 입각하여 메시아가 언약되고 메시아로 성취되는 계시전개의 방법을 통하여 구약과 신약의 내용들이 다양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신구약의 본질과 핵심은 메시아로 집약되고 계시섭리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 선포라는 유일 명제에 귀속된다.

4. 구약과 신약 신자들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쳐주는 신약 구절들

  카이저는 구약과 신약 신자들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딤후3:16-17에 근거하여 구약의 용도를 설명한다. 구약의 용도는 “교훈” “책망” “바르게 함” “의로 교육”함이라 말한다. 카이저가 신구약의 신자들의 관계를 설명하려는 의도는 구약의 수용성을 의식해서인것 같다. 그리고 구약의 용도를 통한 시도는 바람직하지만 구약의 용도를 구분해서 설명해야 될 것 같다.  구약의 간접적인 용도는 신자의 교육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근본적인 구약의 용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하심 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구절을 통한 단순한 근거 보다는 신구약 내용에 대한 근본적인 용도의 맥락에서 신자들의 관계를 설명하는것이 좀더 성경적인 논증방법인것 같다.

    논자는 먼저 카이저가 구약에 대한 종합적인 문제들을 예리하게 분석하여 질문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 질문들을 요약하면 구약의 권위성․구약의 영감성․하나님의 동질성․구약의 수용성․신구약의 연관성․구약의 용도성으로 집약된다. 이러한 문제들은 구약에 대한 근원적인 것들이며 이런 문제들을 정리하지 못한다면 성경의 진리성과 신존재증명도 불가능하게 되리라 본다. 이에 대하여 카이저는 “구약의 학문성”과 “구약과 신학”이라는 주제하에 본격적으로 정리해 나갈것이다.


Ⅱ. 구약의 학문성에 대하여

1. 정경으로서의 구약

1) 무엇이 이 서른아홉권의 책들에 권위를 부여하였는가?
  카이저는 “문서들이 성령의 계시와 영감을 받고 성령에 인도되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씌어진 것들이 그와 같은 저자의 주장을 갖고 있는 다른 책들과 함께 수집되어져야 하며 따라서 그 책들과 같은 방식으로 권위있는 것으로서 취급되어져야 한다.”고 논증하면서 구약의 권위를 주장한다. 이에대해 어떤 자들은 성경이 개념․주제․제도․특정사건․소재상 의미의 다양성과 1,600여년의 성경기록 기간과 40여명의 기자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박에 대하여 카이저의 답변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카이저의 논증방식은 명제적인 단순한 구호에 불과하다. 좀더 구체적이고 원천적인 근거를 구약 자체의 논리를 통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입증해야 될 것이다.

2) 구약 정경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증거와 구분점들은 무엇인가?
  카이저는 이 질문에 대답 역시 구약 정경의 증거를 단편적인 성경 구절과(마23:34-36․눅11:49-50) 역사적 맥락에서 입증하려 한다. 어떠한 논증방법 보다도 확실한 증거는 구약 자체의 논리적 통일성과 신약과의 연관성만 구사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논증방법만이 성경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을 일축할 수 있으며 성경의 진리성을 확립할 수 있을 것이다.

3)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 민족과 그 땅을 현재의 신학에서 취급해야 하는가?
  카이저는 정경으로서의 구약에 대한 세번째 단원에서 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브라함 언약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 중 하나라는 것은 대부분이 인정한다. 그러나 이 언약이 ‘영원한 언약’이 된것은 창17:7, 13. 19의 3중 확인에 와서이다. 창17:8에서는 이 언약의 영원성이 땅의약속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영원함’이라는 단어의 타당성을 여러가지 이유로 논박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언약에 있어서 메시아의 약속과 구원의 약속만이 영원한 것이며 영속적인 것으로 보면서 언약의 세번째 부분(즉 땅)만을 영원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견해이다. 카이저가 갑자기 땅을 언급하는 이유는 선지자들의 예언 성취를 통해서 구약의 정경성을 주장하려는 것이다. 이와같은 방법 역시 지엽적이긴 하나 성경의 예언성취 사역을 통해서 입증하려는 시도는 바람직 하다고 본다. 그러나 땅의 영원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최초의 언약은(창3:15) 영원하지 못했으나 창17:7, 13, 19에 와서야 영원한 언약이 되었다고 하는것은 최초의 언약을 창3:15에 근거한 행위언약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며 또한「영원」에 대한 개념의 인식미숙인것 같다. 영원이란 것은 처음부터 영원성을 지닌것이지 영원하지 못한것이 영원한것으로 변화되는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땅에대한 개념 역시도 구약은 현세적․모형적인 것이며, 신약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실 새 하늘과 새 땅이며, 내세적․신령적인 언약의 성질을 의미하고 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알게하기 위한 계시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될것이다.
2. 비평의 대상으로서의 구약

1) 만일 여리고 성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인가?
  카이저의 이와같은 질문은 역사비평학자들을 의식하고 하는 것 같다. 그리고 현대의 역사연구가 구약의 역사를 얼마나 보증해 주고 있는가? 라는 질문 역시 구약 역사의 사실성 대한 다양한 문제들을 성경적으로 정리하지 못한 결과에서 기인된것 같다. 즉, 이러한 질문들은 성경의 영감성과 진정성에 대한 내용의 진실성을 입증하지 못한 결과이다.

2) 비평적 방법에 결함이 있다면 복음주의자들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
  카이저는 비평적 방법의 큰 결점은 세속적인 비평적 역사방법의 도구가 기독교의 계시에도 과연 적용될 수 있느냐 하는 방법론상의 문제라고 언급하지만 논자의 입장은 성경의 영감성을 부정하는 원천적인 문제로 보여진다. 이에 대하여 카이저는 역사비평학의 대안으로서 멘셀의 주장을 지지한다. “맨셀(H.L.Mansel)은 성경의 어떤부분이 인간의 이성과 모순된다고 해서 그 부분을 제거하려 한다면 이는 인간의 이성을 무한하신 하나님보다 높이는 일일것이다. 이 증거들이 우리의 신앙을 위하여 적절하고 충분하다고 생각되어 진다면 계시의 모든 부분이 신뢰할만한 것임에 틀림없다.” 고 말한다. 이러한 이론 역시 신앙구축을 위한 전제주의적인 방법에 불과하다.

3) 우리는 비평적 방법으로부터 어떠한 공헌을 기대할 수 있을까?
  카이저는 이에 대하여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목적의 방법은 환영하지만 역사비평적 접근 방법만이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된다면 시정되어야 할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카이저의 견해에 대하여 논자는 역사비평학에 대한 관용은 추호도 인정하기 싫은 입장이다. 왜냐하면 역사비평학이란 앞에서 약간 언급한 바 있지만 성경을 과학적․합리적 잣대로 분석하여 성경의 영감성(초자연계시를 부정)과 절대성을 부정하고 성경을 종교적 산물 내지는 문서들의 집합체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을 지닌 자들을 향하여 그들의 주장에 대한 철학적․과학적․합리적 논증방법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논자의 입장은 역사비평학이 전혀 무익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구심과 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라 말 할 수 있겠다.

Ⅲ. 구약과 신학에 대하여

1. 하나님의 약속․계획으로서의 구약

1) 구약신학의 중심점을 찾기 위한 노력은 과연 가치 있는 일인가? 
  카이저는 구약의 중심점을 찾기 위하여, 다양성안의 통일성의 문제? 단일 중심 주제에 의한 통일성 구축에 따른 문제는 없는가? 다양성의 특성은 어떻게 살릴 것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들은 성경의다양성과 통일성의 조화를 통해 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하기 위한 의미있는 접근방법이다. 이에 대한 카이저의 논증을 주의깊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점으로서의 신약의 “약속”
  신구약의 중심점에 대하여 비쳐․베스터만․카이저등의 신학자들은 신구약의 중심점을 아브라함의 약속으로 출발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리스도의 직임과 나라의 성취사역으로 연결시킨다. 그러나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고찰해 볼때, 약속을 중심주제로 채택한것은 좋으나 약속의 내용․대상․성질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있어야 될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원형적․실체적․신령적인 아담에게 하신 언약에 대한 증거적․모형적․현세적인 언약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으로 부터 구약의 내용을 전개한다면 아브라함 이전의 내용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또한 현재의 성도들에게도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다른 부분에서 창3:15을 언약의 근거로 말하고 있지만 이것 또한 타락 이후에 주어진 언약이므로 근본적인 언약은 될 수가 없다. 만약 이 언약을 언약의 출발로 삼는다면 섭리의 주체가 인간이 되며 섭리의 목적 또한 인간의 구원에 촛점을 맞추는 전형적인 구속사 중심의 신학이 된다. 뿐만 아니라 첫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바울의 말을 어떻게 언약의 주제로 설명 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아울러, 동일한 언약의 내용을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3)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점으로서의 구약의『말씀』
  카이저는 약속의 내용을 땅․축복․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의 번성․안식․다윗 왕가의 보좌․그리고 메시아 후손 개념과 관계되는것중 씨, 가지, 돌, 뿌리, 사사, 종, 언약의 사자등으로 설명한다. 계획의 중심점을 약속으로 설정한것은 바람직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일관성이 없으며 다양한것을 볼수있다. 그러므로 약속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명료하게 명시해야 될것이다. 왜냐하면 위와같이 단편적인 주제 중심의 전개 방식은 하나의 언약 개념으로 다양한 주제들을 통일하여 설명하는 개념중심의 방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 개념에 포함되지 못하여 설명될 수 없는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문제점을 야기 시킨다.

4) 신구약 사이의 연속성과 비연속성
  신구약의 연속성에 대하여 벨직신앙고백서는 신약이 구약의것을 되풀이해 말하거나 구약이 신약의 것을 반복하거나 그것은 모두 기본적인 원리에 있어서 변함이 없고 그 효력이 계속된다고 하며, 보에티우스는 신구약의 차이점은 단지 환경의 차이에 의한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카이저 역시 “신약을 모든 구약성경을 밀어 넣어 걸러내는 채로 보거나 혹은 구약의 최종적인 성취로 보아서는 안된다. 오히려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계시에 있어서의 구약 뒤에 오는 단계로 생각한다.” 는 견해를 통해서 신구약의 연속성에 대하여 주장한다. 그러나 논자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첫째 벨직신앙고백서의 내용 처럼 신구약이 상호 반복 내지 되풀이 된다는 말로서 연속성을 주장한다면, 신구약은 표면적인 내용에 있어서 엄연히 차이가 있다. 이러한 내용상의 차이점을 계시적 관점에서 정리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양자의 연속성을 설명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기본적인 원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될 것이다.  둘째로 카이저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다. 카이저는 구약과 신약에 대한 관계를 언약과 성취의 원리에서 이해하지 않고 하나의 총체적인 약속의 범주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신약을 구약 뒤에 오는 순서상의 단계로 설명하고 약속과 성취의 구조가 아닌 약속이라는 하나의 틀을 통하여 막연하게 신구약의 연속성을 설명한다. 물론 시간세계 속에서의 과정상에 있어서는 구약의 언약 내용이나 신약의 그리스도 자신이 하신 약속 내용들이 부분적으론 미래예정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계시형식의 원리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구약 자체는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언약의 내용이고, 신약은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취 내용이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중심한 언약과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취의 관계를 통하여 신구약의 연속성이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신약을 구약의 성취로 보지않고 계속 진행으로만 이해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아직도 미완성이며 성취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언약하신 분이다. 그래서 구약의 내용들은 오실 그리스도를 언약하신 것이고, 반면에 신약의 내용들은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취사역을 기록한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행1:8에 하신 약속들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오순절 성령의 세례 사건은 단회적으로 이미 이루어 진것이며, 땅끝 복음증거는 지금 현재에도 보혜사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진행중에 있고, 마지막 남은 약속인 그리스도의 재림만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것이다. 이 재림의 사건과 최후의 심판 내용 때문에 신약을 성취의 내용으로 보지않는 것은 신약 자체의 본질을 흐리게 하는 우려를 낳게한다. 구약과 신약의 언약에 근거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건과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사건들은 물론 최종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계시형식의 원리적 구조인 언약과 성취의 관계를 무시하거나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미래 예정으로 남아 있는 약속의 사건들은 구약의 언약의 언약대로 오신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신약의 본질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될 것이다.
연속성과 비연속성에 대한 논자의 견해는, 신구약 해석의 원리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다양성의 문제를 정리하고 신구약의 연관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원리가 바로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기본형식인 언약과 성취이다.

2. 메시아 입문서로서의 구약

1) 구약의 저자들은 자기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는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계획에 있어서의 중심 교리는 메시아의 예언이다. 그렇다면 과연 구약 저자들은 메시아에 대한 자각을 갖고 있었는가? 이에대한 일반 학자들의 견해는 명확지 못하나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브라함 때 아브라함의 씨로 만민이 복을 얻게 될것과 유다에게 야곱이 축복할때 왕의 홀이 떠나지 않을것을 근거로 하여 간접적으로 메시아를 대망하였으며, 다윗시대 이후로 부터는 시편을 보더라도 직접적으로 메시아를 대망 했음을 확인할 수 가 있다.

2) 구약에서 메시아를 지칭하는 핵심용어와 구절들은 어떤 것들인가?
  메시아 약속의 뿌리는 씨를 통한 구속 (창3:15․9:27․12:1-3)이며, 메시아 약속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구속성취사역이고, 메시아 약속의 확대는 모세와 왕국시대를 통하여 메시아의 세가지 직분이 소개된 것이며, 메시아 약속의 해설은 다윗 왕조의 성립과 솔로몬 완공에 이르러서 하나님의 메시아 계획은 그 발전 단계에 있어서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고, 메시아 약속의 성숙은 메시아의 왕국은 전 우주를 다스리는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에대한 논자의 견해는 먼저「메시아 입문으로서의 구약」이라는 제목에 있어서 구약이 메시아에 대한 입문이라는 표현 보다는 계시전개방법에 있어서 메시아를 언약한 내용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리라 본다. 그리고 구약성경 전체가 메시아를 지칭하는 언약의 내용이므로 단편적인 성구와 주제들을 통하여 접근하는 방법 자체 역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대한 대답은 언약사적 입장의 전개방법을 도표를 통하여 정리해 보기로 한다.

    3. 구원의 계획으로서의 구약

1) 신앙의 대상과 구원의 방법이 신약과 구약에서 동일한가?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질문은, 구원은 항상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얻을 수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면 구약신자들의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가? 라고 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유일한 구약 성도들의 신앙의 대상이고 그리스도가 신약시대 이래 성도들의 신앙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신구약 사이의 개인 구원이 방법에 있어서 중요한 불일치와 대조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이에대한 카이저의 대답은, 구약에 의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를 믿고 그의 인격과 성품을 믿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믿음은 순종과 연결이 되고 볼신앙은 主의 명령에 대한 반역과 짝을 이룬다.(신9:23)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우르에서 하셨던 약속(땅의 약속)을 확대시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곧이어 닥친 기근 때문에 그는 이 약속의 땅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근도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다면 여기의 기근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그의 약속을 믿었다면 자기 생명을 왜 걱정했을까? 아브라함의 이러한 비굴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된다. 사라가 자신의 누이라고 속인 반쯤은 진실인 거짓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남아있다. 고 말한다. 이러한 카이저의 견해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논자는 좀더 구체적인 질문을 하고싶다. 카이저의 이론대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을 믿은 것이라면, 신약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믿은 것인가 ?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라면 구약과 신약의 신앙적 대상에 차이가 있는것인가? 이에대한 신앙 대상의 문제는 계시방법상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되리라 본다. 왜냐하면 구약은 목적상에 있어서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보여주신 것이고, 신약은 목적을 이루는 방법상에 있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것이기 때문이다.

2) 구약의 죄가 외적인 문제였는가? 내적 문제였는가?
  카이저는 죄의 근원을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돌린다. 이와같이 죄의 문제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속 사역을 위한 죄의 문제인가? 죄에대한 문제는 간단히 취급 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원론적인 입장에서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보편적으론 죄의 문제를 구속의 요인 또는 구속의 동기적 관점에서 취급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섭리의 주체가 인간이되는 인간학의 범주를 벗어나가가 힘들게 된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도 언약사적 형식의 원리으로 이해해야 될것이다. 즉, 죄란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한 한 방편이며, 언약 백성을 죄와 무관하게 섭리하심으로 하나님은 언약대로 이루시는 여호와이시며 살아계신 증거를 확증시켜 주시는 도구적 방편이다.

3) 구약의 희생 제사가 인격적인 면에서, 객관적으로 효과가 있는가?
  카이저는 구약의 성도들은 완전한 희생의 피 즉 예수의 생명으로 인하여 모든 죄의 용서를 선취하여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어린양 만이 객관적 효력을 제공해 줄 수가 있었고 그에 선행하는 주관적 효력은 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권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있기 전에도 구약 성도들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안에서 용서되었다. 구약시대에도 사람들의 죄는 다 용서되어 다시는 기억됨이 없었다.(시103-3,10-12) 고 논증한다. 카이저의 속죄효능에 관한 주장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4) 구약의 성도들은 성령을 어떻게 체험하였는가?
  카이저는 말하기를 성령은 이미 구약 시대 신자들의 안에 계셨으나 구약 시대에 선취적으로 겅험한 신자들의 경험을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 주기 위하여 유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실 필요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사역의 목적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기 위한것이다. 왜냐하면 행1:8의 말씀에 근거해 보면 그리스도 자신이 승천하시면서 언급하신 첫번째 약속의 내용이고, 그 약속의 내용대로 오순절날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서(행2:1-4) 성령강림을 약속하신 예수는 분명히 그리스도이심을 확증시켜 주시는 사건의 단서와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5) 구약시대의 성도들이 사후 세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가?
  성경의 증거를 설펴보면 조상들 왕들 선지자들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사후 세계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사후 세계에 대한 카이저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논리전개 방식에 따른 의미는 재 고찰 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논자는 구약과 신학에 대한에 종합적인 논평을 하고자 한다.
구약과 신학의 단원은 본론의 핵심 부분에 해당된다. 이 단원에서 카이저 신학의 중심사상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카이저는 구약과 신학을 세개의 단원으로 구분한다. 첫째,「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으로서 구약」에서 구약의 중심 개념을 약속으로 설정한다. 그러나 약속의 내용과 약속의 적용 문제에서 너무 단편적인 주제들을 나열하고 성도에게 직접적인 적용을 시도함으로써 중심 주제의 설정과 내용상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함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메시아 입문으로서의 구약」에서 메시아 중심의 연관성을 구약 저자들의 자각성과 예수의 메시아적 진정성과 구약에서 메시아를 증거하는 단편적인 용어와 구절에서 찾으려 노력한다. 이러한 방법으로는 메시아를 총체적으로 언약한 구약의 全 내용을 이해 할 수없고 구약의 논리적 통일성도 발견 할 수가 없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메시아 중심의 연구 방법이 아니라 구속사건 중심의 단편적인 메시아 연구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구원의 계획으로서의 구약」에서는 카이저가 주장하고자 하는 결론적인 내용을 서술하기에 이른다. 먼저 신구약의 통일성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신앙의 대상과 구원의 방법을 통하여 접근한다. 이것은 앞으로 인간의 구속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려는 저자의 의도로 보여진다. 하지만 신구약의 통일성이 신학적인 몇개의 주제에 의해서 언급될 수가 있겠는가?
둘째로 죄의 기원과 성질을 통하여 구원의 요건을 취급하고, 다음에 구약제사의 효능을 통하여 구원의 방법과 효능에 대하여 말하며, 구약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구원의 주체를 밝히며, 마지막으로 구약 성도의 내세관을 통하여 구원의 결과를 밝힘으로서 전형적인 구속사신학의 전모를 명백히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Ⅳ. 구약성경과 신자의 삶에 대하여

    1. 삶의 道로서의 구약성경

1) 신약 성경이 반복하고 있거나 수정한 것들만이 권위를 가지고 있는가?
  카이저는 삶의 도구로서의 구약을 취급하는데 있어서 계시의 원리적 관점에서 다루지 못하고 단순히 신약 성도들에게도 구약의 율법이 구약과 동일한 규범으로서 자리한다는 유용성에 의해서 구약과 신약의 연관성과 권위를 인정하려 한다.

2) 율법과 약속과의 관계
  윌리스 비쳐 (Willis J. Beecher)는 이스라엘이 죄를 지으면 가혹한 형벌 속에서 시달린다. 하지만 다른 죄있는 백성들처럼 아주 소멸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약속은 영원한 것이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유지 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카이저는, 아브라함 언약에 나와 있는 조건적인 요소는 이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을 위협하지는 못하며 그 요소 자체가 약속에 앞서거나 인간의 불순종에 의하여 위협을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
이에 대한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입장에서 고찰해 보도록 하자. 율법은 방법상에 있어서 조건적으로 주어졌으나, 그 용도 면에서는 무조건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 대한 가치성․실효성․은혜성을 깨닫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언약의 방법 면에서는 상반된 차이가 있으나 그 용도 면에서는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이 두 언약은 근본적으로 메시아를 언약하는 계시의 방편이지 인간 생활의 규범적 차원에서 사용되어져서는 안된다.

3) 특수한 율법의 명령들로부터 어떻게 원리들을 끌어 낼 수 있는가?
  카이저는 구약 율법의 많은 부분은 절대적인 도덕률도 아니고 도덕과 사회와 법들을 요약해 놓은 것도 아니다. 구약의 율법은 특별한 시간, 특별한 사람들, 특별한 장소에 국한되는 특수한 법률이다. 우리는 그 특수한 법들로 부터 중간 공리나 일반 원리의 보편성을 번역해 낼 수가 있다. 구약 사례법들의 특수한 예에서 시작하든 우리시대의 도덕적 윤리적 혹은 사회학적 문제에서 시작하든 성경의 사례법들을 현재에 적용시키기 위한 일반 원리를 발견하는 과정은 매우 어렵지만 가능한 것이고 유익한 작업이다. 라고 말한다. 논자가 볼때 카이저는 율법에 대한 명확한 신학적 분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율법을 현재의 삶 속에다 적용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볼때 율법은 계시의 한 방편이며 그리스도를 예언하고 언약하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계명과 율례와 규례로 구분 할 수 있는데 계명은 그리스도의 정죄 받으심에 대한 예언과 언약이며, 율례는 그리스도의 대속(호리라도 남김없이 갚으심)에 대한 예언과 언약이고, 규례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십자가에서 죽으심) 대한 예언과 언약이다.

2. 선포의 주제로서의 구약
  카이저는 구약을 성도 교육의 기능적인 역할의 문제로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자신의 주장을 언급한다. 첫째, 기독교인이 어떻게 구약의 율법부분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을까? 둘째 기독교인이 어떻게 구약의 설화 부분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을까? 셋째,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구약의 지헤 문서를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을까? 넷째,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구약의 예언서를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하여 첫째 율법의 설교문제에 대하여는 율법의 저자가 의도한 꼭 같은 진리로써 하나님의 ‘교훈’을 선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보여주는 어떤 변함없고 보편적인 것이 본문자체 내에 포함되어 있음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둘째 설화의 문제는 설화 본문의 그 당시와 현재의 문제를 다리 놓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설화본문의 적당한 단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본문을 그 자체의 문맥 속에 남겨 두고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가까운 문맥이나 그 인근 문맥에서의 위치, 그 책 전체에서의 위치, 또한 성경 전체에서의 위치를 유기적으로 생각하면서 그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셋째 지혜문서의 설교문제에 대하여 카이저는 지혜문서의 특징은 현세적이며 일상적인 생활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너무 비실제적이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어려운 실제의 세계로 내려오지 않는 것 같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지혜 문서가 그 대답이 될 것이라 말한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예언서 설교에 대하여는 예언서 설교와 가르침은 저자가 의도한 단일한 진리에 의하여 조절되어져야 한다. 예언자들이 의도 하였던 혁명은 일차적으로 개개인의 마음과 삶에서의 변화요 그것에 의하여 사회가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을 유발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능력있는 하나님 말씀의 선포이다. 구약은 우리 기독교 공동체에서 오늘날도 한번 설교되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구약의 교육적 역할에 대하여 논증한다.
그러나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관점에서 고찰해 볼때 카이저의 논증은 근본적인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 첫째, 구약과 신약의 동등성과 연관성을 구속을 중심한 단편적인 주제와 그 근거를 성경의 몇몇 구절들에서 인용하여 논증하려는데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구약 성경의 기록목적을 분명히 파악해야 될 것이며, 그 다음에 목적에 부합된 해석원리를 성경 자체의 논리를 따라서 정확하게 분석 이해해야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해 볼 때 성경의 기록 목적은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알게 하심이 아니라, 언약과 성취로 구성된 계시형식의 원리를 통해서, 작정하시고 예정하신대로 선택한 인간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은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심에 그 근본적인 목적을 둔다. 이러한 원리에서 구약을 이해해야 구약의 현재적 필요성이나 교육적 가치․신구약의 동등성․연관성 등의 문제가 깨끗하게 정리될 것이다.

3. 기독교인의 성경으로서의 구약
  카이저는 구약의 현재적 유용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도전을 한다. 첫째 구약이 현대 사회 문제에 던지는 도전, 둘째 구약이 학문에 던지는 도전, 셋째 구약이 교회에 던지는 도전, 네째 구약이 선교에 던지는 도전이라는 주제의 문제를 던진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카이저의 견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하여, 구약은 삶의 모든 관계 속에서 거룩과 공의가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국적 기업들이 개발도상국에 대하여 하는 착취이든 부요하고 총명한 개인이 하는 착취이든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이 우리는 제도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방법으로써 지도자들의 마음과 개인의 마음에 변화가 있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카이저의 주장은 사회복음주의적 성향과 유사한 색채를 띠고 있다. 이유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카이저가 구약을 성도생활의 규범과 교훈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논자는 구약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심에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사회운동의 성격은 전혀 내포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둘째 구약이 학문에 던지는 도전에 대하여 지금은 종교사회학이나 구약 윤리학 등을 연구해야 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역사비평학자들의 이론을 성경적으로 논파하지 못한 것이고, 구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계시의 말씀임을 입증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다 보니 성경신학을 학문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하고, 방어하게 되는 모순을 낳게 된 것이다. 
  셋째 구약이 교회에 던지는 도전은 구약에 나와 있는 교회의 뿌리에 관한 적절한 이해가 없이는 교회의정체성과 과업, 사명 그리고 이스라엘 국가와 세계와의 관련성들을 정립할 수 없고 구약의 교회와 신약의 교회 사이에 연속성이 없다거나 하는 말은 할 수 없다. 신약과 구약에 교회를 가리키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한 몸에 속하여 있다. 여기에 신구약 교회의 연속성이 있으며 수정된 형태의 불연속성이 있다. 는 것이다.
카이저의 설명은 단마디로 말해서 구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교회의 근본을 이해하기 이전에 구약계시의 원리와 목적과 방법을 먼저 정립해야 될 것이다. 그리고 계시의 결과인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의 문제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계시의 결과적 내용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계시 내용이 구약에서는 에덴동산과 이스라엘의 나라로 주어졌으며 이것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교회)와 천년왕국의 계시로 성취된다. 이러한 형태들은 그 본질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것이다. 즉 교회의 본질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계시의 내용들이다.
  마지막으로 구약이 선교에 던지는 도전에 대하여는 창3:15을 근거로 그 ‘씨’의 일부분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임무는 ‘이방인의 빛’이 되는 것과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은 불쌍하게도 다른 어떠한 사명보다 이 사명에서 실패했다. 그러나 부르신 목적은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로 적용되지만 바로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진정으로 구약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한다.
카이저는 부르심의 목적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부르심의 목적은 베푸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고 경외하게 하심에 있는 것이고, 선교란 신인식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진리로 자유 함을 얻은 당신의 백성들이 자유 함으로 얻어진 사랑의 힘에 의하여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선교는 인간 구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1:8에 근거한 그리스도의 언약이 성취되는 계시의 방편적 도구로서의 목적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이 증명되고, 하나님의 영존하시는 존재를 입증하는 신존재증명(神存在證明)의 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Ⅴ. 종합적 평가

1. 긍정적 평가

1) 구약의 중심개념을 언약으로 보았다.
  카이저는 구약의 중심 개념을 설정했고 아울러 그 개념을‘언약’으로 정리하였다. 언약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 이래로 신약에서도 계속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전개되고 있다. 약속은 단 하나이며 그것은 하와, 셈 ,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에게 주어졌던 것과 동일한 약속이다. 그리고 약속이라는 용어를 창1-11장의 신학을 요약하는 중심단어인 ‘복’으로 보았다. 물론 언약사적 성경신학의 언약 개념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구약의 중심개념을 언약=복으로 정의한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2) 언약의 성질을 일방적인 개념으로 보았다.
  카이저는 언약의 성질을 무조건적이고 단지 하나님만이 의무 조항을 갖고 계시는 일방적인 언약임을 말한다. 그리고 언약의 근거를 사회적 계약이 아닌 하나님의 신실성에 두며, 언약의 불변성을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브라함 언약에 나와 있는 조건적인 요소는 이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을 위협하지는 못하며 그 요소 자체가 약속에 앞서거나 인간의 불순종에 의하여 위협을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정의하는 언약의 성질에 대한 카이저의 견해는 지극히 성경적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신구약의 영속성을 약속에 근거하여 해석한다.
  카이저는 신구약 교회의 영속성을 ‘하나님의 약속’ 계획이라고 하며, 연속성을 나타내는 용어는 ‘하나님 나라’ ‘메시아 예수’ 지만, 그것은 이 약속에 근거하며, 이 약속의 중심내용이기도 하지만, 전체를 포괄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다.라고 논증한다. 신구약의 영속성을 하나님의 계획을 근거로 한 약속으로 접근하는 방식 자체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2. 부정적 평가

1) 구약성경의 진리성을 입증하지 못했다.
  다음 기회가 있을때 카이저의「구약성경신학」을 고찰 해 보겠지만 본서의 내용을 통해서 고찰해 본 카이저의 구약관(舊約觀)은 총체적이지 못하고 부분적이며, 신적계시의 관점에서 구약을 조망하지 못하고 인간의 구속적 관점에 치우쳐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원인은 구약성경 자체의 일관된 논리적 통일성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한데 기인하며, 그 결과 구약의 영감성․정경성에 대한 확고한 변증을 할 수 없게 되어 명제적인 주장만을 되풀이 하게 되는 폐단을 초래한다. 그리고 신구약의 연관성에 대한 논증 역시 구속주의 구속사역 자체에만 집착하여 단편적이고 사건 중심적 경향을 나타내며 그 결과 신구약의 연관성에 대한 명확한 논리를 전개하지 못했다.

2) 구약의 중심개념 설정에 미숙했다.
  구약의 중심주제를 약속으로 설정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약속에 대한 다양한 주제들만 나열했지 성경의 맥을 따라서 일관되게 전개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그리고 최초 약속의 근거를 창3:15로 부터 출발하는 전형적인 구속사 중심의 신학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3) 구약의 유용성에 대해 미숙했다.
  카이저는 구약을 신자의 교훈으로 이해하고 신자의 규범으로 적용한다. 이러한 원인은 본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성경의 목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하나님 섭리의 목적이 인간의 구속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심인가?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이다. 이것을 올바로 해결하지 못한 채로 신학에 접근 한다면 결국에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로 전락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히 잔존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모든 구속사 신학의 결과는 전부 인간의 윤리와 삶에 직결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기독교는 윤리․도덕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다. 성경적 기독교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심을 알고 그 분을 경외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지 율법을 규범화하여 인간의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적 공로주의 신학은 결단코 아닌 것이다.




〔 참고문헌 〕

1. 박용기, 성경개론, 진리의말씀사, 1987
2. 박용기, 성경신학개론, 진리의 말씀사, 1990
3. 박용기, 성경강론, 진리의 말씀사, 1995
4. 성종현, 신약총론, 장신대출판부, 1991
5. Walter C. 카이저(김의원역), 새롭게 본 구약, 엠마오, 1989
6. Walter C. 카이저(최종진역), 구약성경신학, 생명의말씀사,
7. Gehard 하젤(김정우역), 구약신학, 엠마오, 1993
8. John 골딩게이(김의원,박문제역), 구약의 권위와 신학적 다양성,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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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四福音書)의 통일성과 다양성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논쟁에 대한 재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