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집 근처에 ‘큰’ 교회가 있다. 5층짜리 건물에 주차장과 엘리베이터가 구비된. 3층에는 우리 동산 교회 예배당의 두 배가 되는 크기의 선교카페-평면 TV 두 대와 그랜드 피아노가 홀 중앙에 놓인-가 있고, 일반인들은 보러 ‘가는’ 뮤지컬을 이 교회에선 단관을 따로 내어 뮤지컬 팀을 초청한다.
그 대형교회의 카페에서 여름을 나고 있다. 차 값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책을 이고 가서 천 원짜리 차를 한 잔 시켜놓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공부를 한다. 공부를 하다 주변을 둘러보면 종종 진기한 장면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소그룹 모임의 젊은이들이 둘러앉아 근 한 시간가량 통성기도를 하는 모습은 가히 압권이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던 중에, 그 그룹에서 ‘전도사님’이라 불리던 남자와 마주쳤다. 그는 빳빳하게 다린 검은 슈트 바지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금욕적인 무테안경을 썼는데 무척이나 거룩하고, 악의라곤 털 끝 만큼도 없는 순하고 깨끗한 표정으로 가스펠 송을 흥얼대고 있었다.
순간 메스꺼워졌다. 냉소와 혐오가 밀려왔다. ‘중보 기도함’을 떡하니 복도에 걸어놓고, 값비싼 상품들을 바자회용이랍시고 쇼윈도 안에 전시하고, 성경 대신 일렉 기타와 모임용 교재를 들고 다니는 너희들이 신에 대해 뭘 알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어느 곳도 허름한 구석이 없는, 눈이 돌아가게 현란하고 삐까뻔쩍한, 물신숭배의 현장인 이곳에서 그리 경건한 얼굴로 주를 찬양하다니. 그건 독선의 또 다른 형태와 진배없다. 진리를 설파하는 곳은 교회의 구색만 겨우 갖출 뿐인데, 기복을 조장하는 곳은 그야 말로 아방궁에 다름 아니라니 씁쓸했다. 알맹이가 부실해도 외형은 그처럼 기형적으로 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그렇다고 외형적으로 볼품없는 교회들이 진리를 담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교회를 짓고 교회를 다니는 걸까. 그들이 믿는 신은 대체 그들을 어떤 식으로 감동시켰기에 물심양면으로 교회에 목을 매게 했을까.
그들의 통성기도가 계속 될 동안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읽었다. 무척 흥미롭고 통쾌했다. 물론 내가 이 텍스트의 심층적인 의미까지 제대로 파악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니체를 알고 이 책을 읽으면 니체를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고서는 니체를 알 수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나는 니체에 관해선 이제 겨우 발끝만 담근 정도의 지식을 갖고 있고 그나마도 적을 두고 한 공부가 아니기 때문에, 몇 개의 단편적인 사실 정도만 내가 아는 니체와 대입해 살펴볼 수 있었다.
짜라투스투라라는 현자가 10년 동안 산 속에서 수련을 하고 서른이 되는 해에 세상으로 나온다. 예수를 모델로, 예수의 행적이 나타나있는 사복음서를 모티프로 했다고 한다. 성경을 두고 비유적인 내용도 많이 나온다. 예수를 비꼬는 듯 하기도 하고, 동양철학을 조롱하기도 하며, 신을 조롱하기도 한다.
니체가 신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이유는 ‘영원한 세계’ 때문이다. 영원이 있으므로 현재의 인간들이 주어진 삶을 경시 여기고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이다. 또한 신은 죄와 죄가 아닌 것을 구분하고 상벌을 가하며, 신의 뜻을 계승한 자들은 묵시록적인 분위기로 공포심을 조장한다. 이 이분법적인 사상에 대해 그는 적개심을 감추지 않는다. 선악에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에 준한다고 볼 수 있다.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이런 내용이 있다. 신들 중 한 명이 이제부터 자기만이 유일신이라고 선포한다. 그러자 다른 신들이 마구 폭소하다가 웃겨서 죽는다. 신은 그렇게 ‘웃겨서’ 죽기도 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향한 니체의 냉소와 비판을 충분히 이해한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없다면, 그것이 당연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큰’ 교회의 ‘자매님’, ‘형제님’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분개할까, 아니면 ‘믿음이 부족한’ 니체를 연민하며 가엾이 여길까.
무엇이든 내실이 중요한 것 같다. 내실도 꽉 차고 외형도 그럴싸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둘 중 하나를 선택하자면 전자에 힘을 주는 게 옳지 않을까 한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들과 감히 비할 수 없는 진짜 진리가 있다. (사실, 우리는 진리가 있기에 독선적일 수밖에 없다지만 일반 기독교인들이 왜 독선적인지는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논리성과 통일성을 입증해내지 못한다면 진리의 자격을 잃게 되고 그렇다면 성경은 그저 하나의 경전에 불과해지는데 어째서 신을 믿을 수 있는 걸까?)
엊그제 동산교회 초기부터 계셨던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양말을 팔러 다니면서 이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애쓰셨던 그 분의 이십대. 한 달에 한 번도 채 안 되게 대구로 내려오시는 목사님의 강의를 듣는다는 생각에 일주일 전부터 잠 못 이루며 흥분으로 들떴던 날들. 그렇게 지켜온 교회였고, 그렇게 지켜온 진리였다. 그 분들의 애정과 수고가 있었기에 오늘날 이토록 편하게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체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크게 짓고 훌륭하게 치장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이 진리의 말씀이 왜곡되거나 호도됨 없이 곧고 순수하게 보전해내는 것이 진짜 사랑이란 생각이 든다. 늘 하는 다짐이지만 정신을 더욱 똑바로 차리고 성경신학 공부에 매진해야 되겠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교회를 지켜주셨던 성도님들과, 어떤 것에도 타협함 없이 말씀을 전해주셨던 목사님들께 문득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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