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2-06-21 22:2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인도에서 부치는 여섯 번째 편지


테이블 위의 사과는, 굳이 자르거나 껍질을 깎지 않아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색이 변하고 주글주글해집니다. 사람 역시 아무 일을 하지 않고 무생물처럼 가만히 누워 지내도, 흘러가버린 시간의 길이만큼 늙게 되지요. 저항을 하건 하지 않건 우리는 시간이라는 강풍 앞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가련한 피조물들입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한정된 시간을 쓰려는 우리의 육체도 한계를 입고 있어요. 그 유한함은 공간에도 적용이 됩니다. 그렇기에 떨어져 있는 것이 힘들고, 마음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괴로운 거겠지요.
 
이메일과 좀처럼 하기 힘든 통화로만 안부를 확인했던 부모님이 인도에 오셨어요. 실감이 나지 않아서 손을 잡고 껴안고 자꾸만 만져보았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함께 할 수 없음이 너무나 답답하고 서러웠는데 이리 눈앞에 나타나시니 영 얼떨떨하고 이상하더라구요.
 
꿈같은 3주였습니다. 제 인생을 통틀어 가장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런 걸 보면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게 맞는가 봅니다. 굳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이 충만했으니까요.
 
 3주 후, 오지 않았으면 했던 작별의 날이 왔고 저는 울보답게 모두의 예상대로 눈물을 쏟았어요. 겨우 추슬렀다고 생각했는데 빈 집으로 돌아와 아빠가 작업하던 노트, 엄마가 만들어놓은 밑반찬을 보는 순간 또 가슴뼈가 후두둑 내려앉더라구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뭐에 홀린 기분입니다. 정말 부모님이 여기 계셨던 거 맞나. 그걸 증명해줄 수 있는 건 오로지 타인의 기억들과, 시간이 지나면 썩어질 몇 개의 물건들뿐인데. 아니 도대체 이 피조세계는 어찌 이리 모든 게 다 불완전하단 말인가요.
 
함께 하지 못하기에 ‘함께’의 본질에 대해 더욱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것 같아요. 코흘리개 어린애처럼 엄마 아빠의 손을 꼭 잡고서 매순간 존재를, 지금 같이 있음을 확인하고 기뻐했어요. 그것은 내가 영원에서 누리는 강렬한 한 조각의 기쁨에 불과했겠지만요. 한국으로 돌아가시고 난 이후가 힘들까봐 우려했는데, 3주간의 행복은 모든 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았습니다.
 
피조물이기에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피부로 말로 호흡으로 일일이 확인해야 만이 비로소 ‘함께’를 느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더 절박하고 안타깝고 부족했습니다. ‘만들어진 자’로써의 한계를 가장 여실히 실감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물리적인 사건 사고를 통해서도 위로를 주시지만 감정의 전후 또한 어루만지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영원’이 있다는 것 말이에요.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평온해졌습니다. 영원. 가장 깊고 근원적인 위안.
 
 우리는 영원을 선물 받은 사람들이잖아요. 이 세계의 가장 뛰어난 두뇌라 해도 감히 그려볼 수 없는 그것을 이미 창세 전 언약 받았고 현재도 누리고 있으며 죽고 나면 더더욱 생생하고 아름답게 묶일 수 있는 것을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곳 아니,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곳.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거나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곳. 여기와 저기가 없어, 그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가 되어 한 덩어리로 숨 쉬고 즐거워하고, 권태와 공허와 슬픔 없이 전심으로 흠뻑 행복할 수 있는 곳. 헤어짐의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는 곳. 한 몸 한 뜻으로 여호와를 사모하며 끝없는 안식을 누리는 곳. 아무 대가도 없이 거저 받은 최고의 선물.
 
 하나님의 품 안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려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우리들만의 특권. 모든 것에 끝과 마침표가 있음에 서글픔이 밀려올 때, 부드러운 한 줄기 바람처럼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그것. 영원.
  이보다 더 근사한 위로가 어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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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운동으로 인한 교회의 하나됨 안에 다름
동방문제란 무엇인가?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