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작성일 : 10-04-30 08: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포도와 기쁨


이스라엘에서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는 8, 9월 경이다. 이때는 한 여름의 햇빛이 가장 강렬하게 내리쬐는 한여름으로서 숨을 쉬기조차 힘든 계절이다. 모든 땅이 회색빛으로 타들어가는 이스라엘에서 이맘때쯤 청포도가 영글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은 포도를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부르곤 했다.

4월부터 시작된 건기의 끝 무렵인 포도 수확기는, 웅덩이에 모아놓은 물이 바닥을 드러낼 시점이다. 광야의 백성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꿀’보다 더 귀한 것이 바로 ‘물’이었다. 생명과도 같은 물이 바닥날 즈음에 정확히 때를 맞추어 회색빛 광야를 뒤로 한 채 한껏 영근 청포도를 따서 포도주 틀에서 밟는 것이다. 이것은 곧 포도주로 탄생할 것이고,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자연스럽게 ‘해갈의 기쁨’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해갈의 기쁨’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음주문화가 음란문화와 뒤섞인 한국에서, 포도주는 기독교인들이 금해야 할 ‘술’의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음료수’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해갈의 기쁨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응용되느니라”(전10:19)

포도나무에게 나무의 왕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지만, 포도나무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었던 것은 포도주가 사람들에게 주는 기쁨과 영광이 왕이 되어 누리는 일시적 권세보다 영원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나의 새 술을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요동하리요 한지라”(삿9:13)

성서시대 유대인들은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밟으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이 바로 시편8편, 81편, 84편이다. 이 세 개 시편의 머리에는 모두 ‘깃딧에 맞춘 노래’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깃딧’은 두 변째 음절에 액센트가 있는 노래로서, 아마도 포도주나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을 의미하는 ‘가트’에서 나온 말인 듯 하다.

웅덩이의 물이 바닥난 이때쯤 포도를 밟으며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기쁨, 그리고 이 기쁨과 함께 부르는 세 개의 시편은 마치 추수철 우리나라 들판에서 울려 퍼지는 사물놀이패의 노래와 같을 것이다. “쾌지나 칭칭 나네…”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할 때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밟을 사람이 사라지고 포도원에는 ‘노래’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포도원의 노래란 포도를 밟으며 부르는, 다름 아닌 시편의 3개의 노래인 것이다.
“포도원에는 노래와 즐거운 소리가 없어지겠고 틀에는 포도를 밟을 사람이 없으리니”(사16:10)

야곱은 열두 아들을 축복할 때 특별히 유다에게 놀라운 축복을 해 주었다. 그의 예언대로 유다 지파에서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다. 유다를 향한 축복 중에 재미있는 것은 포도주와 관련된 것인데, 유다는 그 옷을 포도주로 빨고 복장을 포도즙에 빤다는 표현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눈이 포도주로 인해 붉겠다는 것인데, 이는 잘못된 음주 문화가 팽배한 한국적 정서에서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표현이다. 흔히 술을 많이 마셔서 눈이 벌겋고 코가 빨개진 술주정뱅이를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이 귀한 광야의 이스라엘에서 포도주는 술이 아닌 음료수였고, 그것도 생명을 살리는 음료수였다. 그러므로 유다를 향한 야곱의 축복, 즉 포도주로 옷을 빨고 그 눈이 포도주로 인해 붉겠다는 표현은 유대인들의 정서로 해석할 때 유다 자손에게 임할 ‘넘치는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청49:10-12)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세데르(일명‘최후의 만찬’)를 하셨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저녁식사를 밤12시까지 하는데 이 때 모두 4잔의 포도주를 마신다. 제자들과 함께 한 지상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선포하시는데, 이는 예수님만이 인생의 참된 기쁨과 만족과 축복의 근원이 되신다는 놀라운 선포가 되는 것이다.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요15:1)

포도주 밟기, 튀는 선혈, 그리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유다 산지의 바위들은 쉽게 깍이는 ‘석회암’(limestone)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주로 산지에 거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산을 계단식으로 깎아서 테라스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아울러 포도주틀도 석회암의 바위를 파서 만들었는데, 이는 크게 두 개의 서로 다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포도를 밟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밟아서 액체가 된 〈포도즙이 흘러내려서 모이는 곳〉이었다.

대체로 포도를 밟는 곳이 위에 있고 포도즙이 모이는 곳은 아래에 있어서 밟은 포도의 원액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각각의 장소가 상징하는 바가 극단적으로 대비된다는 것이다.

포도즙 원액, 즉 생명을 기쁘게 하는 음료수가 모이는 장소는 예외없이 해갈의 기쁨을 상징하지만, 포도를 발로 밟는 곳은 포도를 밟는 ‘기쁨’과 동시에 정반대로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 포도를 밟는 기쁨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지만, 이 장소가 동시에 심판을 상징한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포도를 밟을 때는 온 가족이 함께 들어가서 밟으며 포도주 틀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가야 했다. 물론 들어가기 전에 발을 깨끗이 씻는 것은 기본(?)이었다. 맨발로 밟아야 포도의 씨가 깨지지 않고 깨진 씨로 말미암아 포도주에 쓴맛이 베이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포도를 밟는 것은 온 가족, 더 나아가 당시 씨족 공동체로 이루어진 한 마을 전체의 잔치날과 같은 행사였다.

포도를 밟는 틀 위로 큰 줄이 있고, 포도를 밟는 사람들은 그 줄을 두 손으로 잡고 한참을 포도를 밟으며 시편의 노래를 쩌렁쩌렁하게 불렀던 것이다. 한 마을의 전체 축제였으니 포도주 틀에서 포도를 밟는 노래는 옆 마을에까지 들리고도 남았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열국을 심판하시는 소리도 포도 밟는 자와 같이 울려퍼질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부르시며 그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발하시며 그 양의 우리를 향하여 크게 부르시며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 밟는 자같이 외치시리니”(렘25:30)

온 가족이 좁은 포도즙 틀에 들어가 열심히 밟다보면 포도즙이 틀 밖에 있는 사람들의 옷이 튀기도 한다. 그러면 빨간색 포도즙으로 옷에 베이는데, 이는 마치 붉은 피, 선혈과 같이 보일 것이다. 발로 밟아서 포도를 으깨는 이미지와 함께 그 튀는 포도즙의 색깔이 붉은 핏빛이기 때문에, 포도주를 밟는 틀은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 포도를 밟고 난 찌꺼기는 사발에 담는데, 이것 또한 심판의 사발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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