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의 세상이 모여 만든 세상
<미생>
연령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시청자들이 폭넓게 공감하는 드라마는 주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 혹은 남녀 간의 로맨스이다. 연애에서 가족이 탄생하고 그들이 우리 생의 중요한 사람이자 이야기이니 당연할 법도 하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하루 일과의 중간 토막을 차지하는 것은 ‘일’이라는 것. <미생>은 이 ‘일’이 이루어지는 주 무대인 회사를 배경으로, 각기 치열하게 자기 싸움을 하는 넥타이 부대의 일상을 보여준다.
회당 에피소드로 완결이 되는 형식으로 몰입도를 높인 <미생>은 주 조연들의 ‘신들린’ 연기력과 연출 때문에 원작의 아우라를 거뜬히 압도하며 명실상부한 웰메이드 드라마로 연일 화제를 뿌리고 있다. 미생(未生)의 뜻은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뜻으로 완생(完生)으로 나아가기 위한 각개 삶의 고군분투를 그리고 있다. 이 드라마를 찬찬히 보다 보면 이십 대의 어린 인턴부터 대리, 과장, 부장, 전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 다양한 스펙트럼의 고뇌와 애환을 느낄 수 있다.
항상 과장된 중상모략이나, 여자 하나를 사이에 둔 남자들 간의 신경전, 도통 납득이 안 가는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으로 인한 억지 감동들이 불편해 드라마를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미생>은, 디테일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원작에 등장하는 상황들을 실제적으로 구성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치 그곳에 있는 듯한 현장감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결정적으로 이 드라마에 마음이 동하는 이유는 악인이 없어서이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챙길 거 챙기는 부장, 신입을 비인간적으로 ‘갈구’면서도 내심 걸려 하는 대리, 상사의 일을 떠맡아 밤을 새운 게 억울해 선배를 들이받는 신입, 한 가정의 가장인 데다 공부하고 싶은 꿈도 있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만년 동네북이지만 후배들 앞에서 허세 부리는 대리, 어디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스펙에 자만이 하늘을 찌르지만, 인정받지 못해 이직을 고민하는 신입, 줄 좀 잘 서라고 깐족대는 라이벌 과장 등.
10화는, 아랍회사와 계약을 하는 것처럼 꾸미고 중간에 유령회사를 세워 백마진(back margin)을 챙기는 박 과장의 비리를 영업 3팀이 폭로하는 에피소드를 꾸렸다. 박 과장은 직속 사원 장그래를 개인 심부름꾼으로 여기고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지만, 장그래는 이에 반응하지 않는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반응하지 않고 나의 순류를 지키는 것. 그것은 곧 상대에게 역류가 된다’는 장그래의 독백은 드라마의 맥을 끝까지 붙들어간다. 백마진 정도로 알았던 비리는 결국 어마어마한 규모였음이 들통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박 과장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전후관계 즉 팩트를 밝히는 것이 회사에 중요하다는 김 대리의 한마디는, 조직의 시스템과 절차가 사사로운 복수심 따위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명시해준다.
마지막 장면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것이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의미의 ‘그래봤자 바둑’. 하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허락된 세상이기에 치열하게 애쓰고 사랑할 ‘내 일’이란 의미의 ‘그래도 바둑’.
즐겁고 좋아하는 것만이 일로써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 시간을 반납하고 충실하게 타인의 시간을 버텨내는 것. 그것은, 흥미도 재미도 없는 순수한 노동이기에, 오히려 더 대단한 것이지 않을까. 새삼, 정직한 땀방울을 흘리며 회사에서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이 땅의 무수한 샐러리맨이 참 멋있구나 싶다. 그렇게 자신만의 경험치와 방법론을 차곡차곡 쌓은 하나의 세상들이 모여 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이든 입체적으로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사소한 사건 하나를 통해서도 당신이 어떤 분인지 알게 하신다. 하기 좋은 일이든 싫은 일이든 그것을 통해 반드시 주고자 하는 게 있으시다. 그렇기에 어떠한 노동도 의미 없는 것은 없다. 그저 그 과정을 충실히 이행하면 그 자체로 보상된다. 일도, 사람도, 사건 사고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때 그때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하면, 즉각적으로 생겨나는 내 감정 하나조차도 얼마나 섬세하게 관찰하고 느껴야 할 것들이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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