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아닌 둘, 둘 아닌 셋이 주는 포근한 위로 <어바웃 어 보이>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현상에 대해 집요한 '왜?'를 버릇들인 순간부터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다. 인도에서 돌아온 이후 급격히 관심이 생긴 '사람'과 사람이 가진 문제에
귀를 기울이는 요즘이다. 왜 그들이 그러한 문제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에 관해 의문을 갖고 한 꺼풀 한 꺼풀씩
벗겨내다 보면 더 이상 벗겨낼 것이 없는 그 자리에는 반드시 원인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특정한 행동양식이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게 그 원인이란 것들은 거의가 상처로 인한 슬픔이었고 그 상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존재들로부터 빚어진 것이었다. 인간은 관계의 동물이기에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라면야 대부분 아픔은 관계로부터 출발했을 테고 그렇기 때문에 진단도 치유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다.
나를 챙기고 내 상처를 돌아본다는 것, 나만 알고 있는 텅 빈 공간에 아무렇게나 쏟아져 있는 나와 나의 기억과
묵은 감정의 잔해들을 마주한다는 것, 그것은 분명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상처란 순간의 힘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니기에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천천히 응시하고 끌어안아야 한다. 울부짖고 망가지고 무너져도 된다.
그 과정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바닥뿐인 나 자신을 인정하는 것. 그래야 그 다음 단계를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악하고 추하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이고 야비하고 틈이 날 때마다 외로움에 치를 떠는, 그래서 너무나
불완전한 인간임을 받아들이면 된다. 간단하다. 인정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 인간의 자존심에
적지 않은 흉터를 남기는 것 같다.
이 지점에서 나는 아주 근사한 보호막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다. 완전한 것은 여호와 뿐이고,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이렇게 지어 놓으셨다는 것. 그러니까 애초에, 완전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사실, 그러므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 말이다. 내가 불완전한 존재라는
데에 대한 긍정은 인정보다도 한 발 앞서 나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 단게에서 0이 아닌 +1에 설 수 있는
것이다.
관계, 그리고 치유와 관련해 소개할 영화는 <어바웃 어 보이>다. 물려받은 유산으로 한량 라이프를 즐기는
철없는 미혼남 윌은, 우울증 엄마와 단 둘이 사는 괴짜 소년 마커스를 만나며 조금씩 마음의 변화를 맞이한다.
필요에 의한 관계를 맺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번거로워하는 윌에게 마커스는 밀어붙이듯 윌의 영역을
침범한다. 우울증으로 자살 시도를 했던 엄마로 인해 혼자 남겨질 뻔 했던 마커스는 '둘로는 부족하다'라는
위기의식을 갖고 제 3의 멤버를 찾아 나서게 되는데 그의 눈에 든 게 윌이었다. 필사적으로 도망다니는 윌과
필사적으로 쫓아다니는 마커스가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들이 맞물려 따듯하고 유머러스한 감동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인간은 섬이다'라는 윌의 시니컬한 대사로 시작해서 '인간은 섬이다. 그러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섬이다'라는 윌다운 맺음으로 끝이 난다. '관계'의 맞은 편에 자리한 숙명적인 고독과 아픔을
다시금 '관계'를 통해 치유할 수 있다고 토닥여주는 착한 영화다.
관계를 통하지 않고도 고독과 공허를 자연스럽게 초월한 사람들이 있다. 진리로써 완전함과 영원함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충만함을 느끼는 사람들. 나는 시간의 틈새에서 공허함과 고독을
느낄 때마다 나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긴다. 이전에도 말했었지만 그 불행을 관계 속에서 찾고자 했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진리에 온전히 함의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하여 내가 인간으로써 추구하는 또 다른 목표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관계가 아닌 진리를 통한 충일함. 그것으로 나의 불행을 구원하고 나아가 나와 관계한
모든 이들에게 진정성이 담보된 위로를 건넬 수 있는 삶.
셋이 아닌 둘, 둘이 아닌 홀로여도 굳건히 서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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